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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및 시조


본관 및 시조

 

 

-

기계유씨 본관

 

 

-

기계유씨 시조

 

 

-

부운재(富雲齋)

 

 

-

아찬공 시조묘소 약사

 

 

-

기계유씨 시조 유허비

 


<기계유씨 본관>


 ◎ 유래


  유씨(兪氏)의 시조(始祖) 신라 아찬(阿飡) 유삼재(兪三宰) 공의 후손 유의신(兪義臣) 공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 왕건이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유씨(兪氏)의 본관은 조선시대에 엮은『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98본으로 전하지만 기계(杞溪)·강진(康津)·고령(高靈)·무안(務安)·인동(仁同)·창원(昌原)·천녕(川寧)·탐진(耽津)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유씨(兪氏)는 모두가 신라 때 아찬(阿飡)을 지낸 유삼재(兪三宰)공을 도시조(都始祖)로 하는 동원(同原) 분파이며, 그 중에서 기계유씨(杞溪兪氏)가 대종(大宗)으로 유씨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통계청(www.nso.go.kr)에서 최근 2003년 1월 발표한 유씨성(兪氏姓)을 가진 본관의 종류와 지역별 인원분포이다.

                                                                

□ 본관별(인구기준)

연번

본관

가구(수)

인구(명)

남자(명)

여자(명)

1

기계(杞溪)

34,984

113,430

59,054

54,376

2

경주

2,905

9,502

4,386

5,116

3

고흥

2,836

9,131

4,506

4,625

4

창원

2,442

8,007

4,223

3,784

5

진주

2,477

7,789

3,914

3,875

6

무안

2,092

6,629

3,213

3,416

7

강원

1,501

4,871

1,989

2,882

8

풍산

737

2,292

1,165

1,127

9

강진

467

1,589

633

956

10

인동

452

1,514

700

814

11

파평

438

1,508

624

884

12

강화

372

1,177

552

625

13

하회

307

1,128

350

778

14

부안

241

795

313

482

15

공주

233

758

345

413

16

고령

238

735

296

439

17

밀양

216

701

284

417

18

김해

216

666

285

381

19

천녕

188

658

324

334

20

안성

191

618

273

345

21

단양

172

565

216

349

22

달성

180

545

226

319

23

금산

147

471

203

268

24

광주

149

467

179

288

25

남원

144

461

182

279

26

청주

128

438

181

257

27

해주

123

428

173

255

28

장사(무장)

107

349

150

199

29

상주

105

344

143

201

30

예산

93

341

134

207

31

미상

31

173

87

86

32

탐진

32

83

48

35

33

기타

7

41

28

13

34

사천

2

5

3

2


<주석>

1) 가구, 인구 : 국내거주인구를 중심으로 가구수는 가구주의 성씨·본관을 기준으로 집계

2) 본관의 "기타" : 조사표상의 기입내용이 불명확한 경우, “미상” : 조사표상의 미기재 사항

3) 2000년 11월에 조사하여 2003년 1월 발표한 통계청 자료 기준이며 경주를 본관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기계가 본관으로 추정되며 이는 조선시대까지 기계현이 경주부의 속현이였기 때문임.

4) 신라·고려시대부터 기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기계윤씨, 기계진씨 등)가 있었으나 현재 기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기계유씨가 유일함.

□ 지역별(인구기준)


연번

지역별

가구(수)

인구(명)

합   계

54,953

178,209

1

 서울특별시

12,996

41,869

2

 경기도

12,370

41,591

3

 충청남도

4,210

12,937

4

 부산광역시

3,305

10,812

5

 인천광역시

3,114

10,470

6

 경상북도

2,959

9,127

7

 대구광역시

2,722

8,828

8

 경상남도

2,506

8,015

9

 대전광역시

2,033

6,857

10

 전라북도

1,814

5,620

11

 전라남도

1,699

5,365

12

 충청북도

1,459

4,591

13

 울산광역시

1,213

3,923

14

 강원도

1,216

3,835

15

 광주광역시

1,025

3,368

16

 제주도

312

1,001



 


 ◎ 연혁


  기계(杞溪)는 본래 신라의 모혜현이였는데, 경덕왕때 기계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는 경주군에, 조선시대에는 경주부 기계현에, 일제시대에는 영일군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 속해 있다.


시대별로 기계(杞溪)의 연혁을 살펴보면,


① 신 라 시 대

 삼국통일 직후 5소경(小京)의 하나인 금관金官(경주,慶州)에 속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 의창군(義昌郡) 모혜현(芼兮縣, 일명 화계현, 化鷄縣)에서 기계현(杞溪縣)으로 개칭


② 고 려 시 대

 현종(顯宗) 9년(서기 1018) 경주군(慶州郡)에 소속


③ 조 선 시 대

 서기 1415년 경주도(慶州道) 경주부(慶州府) 기계현(杞溪縣)으로 칭함

 (성법부곡 省法部曲 편입)

 1906. 9. 24(칙령 제49호) 경주군(慶州郡)에서 흥해군(興海郡)에 속함


④ 일 제 시 대

 1914. 3. 1(총독부령 제111호) 연일, 흥해, 장기, 청하군을 통합 영일군이 되면서 영일군에 속함


⑤ 대 한 민 국

 1986. 4. 1 영일군 기북면 분리 (36개리∼24개리)

 1995. 1. 1 포항시와 통합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 행정구역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면적 91.96㎢, 인구 7,278명(2001)이다. 북·동쪽은 신광면(新光面)·죽장면(竹長面)·기북면(杞北面), 서쪽은 영천시 자양면(紫陽面)·임고면(臨皐面), 남쪽은 경주시 안강읍·강동면(江東面)과 접한다. 16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 동쪽의 비학산(飛鶴山:762m)·용산(龍山:307m)을 잇는 산릉과 서쪽의 침곡산(針谷山:725m)·운주산(雲住山:806m)·어래산(魚來山:565m)을 잇는 산릉 사이에 형산강(兄山江)의 지류인 기계천이 개석하여 만든 태백산맥의 한 침식분지가 면의 중심부를 이룬다.

 산업은 기계천 양안에 상당히 넓게 형성된 충적평야에서 주로 논농사를 하며, 그 외에 고추·담배·감 등도 생산된다. 취락도 대부분이 이 평야지역에 있다. 울산∼태백시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며, 2004년12월 대구-포항간 고속도로가 기계면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 졌다.


 문화재로는 봉강재(경북문화재자료 201), 영일 기천고택(경북문화재자료 205), 분옥정(경북문화재자료 267), 삼원당(三願堂), 화수정(花樹亭), 성강서사(星岡書社), 학계정(鶴溪亭), 부운재(富雲齋,기계유씨시조 재실), 왕동재사(王洞齋舍), 용계정(龍溪亭), 사의당(四宜堂), 고인돌 등이 있다.


<기계유씨 시조>

이미지 사진

(시조묘소.jpg), 

이미지 사진

(시조묘소전경2.jpg)

위치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신라때 아찬(阿飡)까지 관직을 하신 유삼재(兪三宰) 공(公)이시다.


신라 아찬(阿飡) 관직은 신라 17등급의 관직중에서 6번째에 해당되는 자리로서 일명 아척간이라고도 한다. 17등급중 제1위인 이벌찬부터 제5위인 대아찬 까지는 진골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등용되었기 때문에 진골 아닌 사람은 아찬(阿飡)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비진골인자로서는 최고의 벼슬자리였다. 뿐만 아니라 진골인 사람은 아찬(阿飡)에서 직접 대아찬에 승진할 수 있어서 중아찬제도가 필요치 않았으나 비진골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은 아찬(阿飡)부터 중아찬, 삼중아찬, 사중아찬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아찬의 중위인 중아찬, 삼중아찬, 사중아찬은 모두 아찬이라고 불렀다. 신라인의 신분은 골품제에 의하여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성골,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등이 있었다. 성골(聖骨)은 양친(兩親) 모두가 왕족인 자를, 진골은 양친중 한편이 왕족인 자를 말한다.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은 제육위관인 아찬이하 제17위관인 조위(造位)까지의 관직을 맡을 수 있는 지배계급으로 귀족에 속하였다.

☞ 출처 : 부운보(富雲報) 제1호(1983.6.15) - 명지대 유재은(兪在殷) 교수


신라시대 관직을 제정한 기록을 살펴보면, 2대 남해왕(南解王)때는 대신(大臣)을 대보(大輔)라고 하였다가 3대 유리왕(儒理王) 때에 처음으로 17등급을 제정하였다.

이때의 17등급은,

1등급: 이벌찬(伊伐飡, 각간·서발한)

2등급: 이척찬(伊尺飡, 이찬)

3등급: 잡찬(迊飡 ,소판)

4등급: 파진찬(波珍飡 ,해간)

5등급: 대아찬(大阿飡 )

6등급: 아찬(阿飡 , 아척간) 

7등급: 일길찬(一吉湌,을길간)

8등급: 사찬(沙湌, 살찬)

9등급: 급벌찬(級伐湌,급찬)

10등급: 대나마(大奈麻, 대나말)

11등급: 나마(奈麻, 나말)

12등급: 대사(大舍,한사)

13등급: 사지(舍知, 소사)

14등급: 길사(吉士, 계지·길차·당)

15등급: 대오(大烏, 대오지)

16등급: 소오(小烏, 소오지)

17등급: 조위(造位, 선저지)와 같고 1등의 아벌찬에서 5등의 대아찬까지 진골만이 차지할 수 있었고, 그 외의 관직으로는 6등 아찬(阿飡)이 최고의 벼슬자리였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신라 때 아찬(阿飡)의 벼슬을 지내셨으니, 우리 시조할아버지는 양민으로서는 그 이상 오를 수 없는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신라의 벼슬은 우리말을 한자로 차음(借音)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아(阿)”는 아마 사물의 근원 ‘아시'를 나타내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시(始)'◦‘조(祖)'◦‘전(前)'◦‘남(南) ‘등의 여러 뜻을 지닌 것이다. 찬(飡)은 '飡‘◦ '粲‘◦'餐‘ 등으로 쓰기도 한다. 이것은 척간(尺干)의 음이 줄어서 된 말이다. 척 (尺)은 '잣‘으로 본시 '성(城)‘을 뜻하는 말이다. 간(干)은 '한‘으로 군주를 뜻하는 말이다. 이 '자+한‘이 '찬‘이 된 것이다. 餐과 飡은 현대음으로는 '손'으로 읽기도하나 '자+한‘의 준말이란 점에서 '찬‘이 옳다. 따라서 아찬(阿飡)은 '대성주(大城主)‘ 즉, '큰 성의 성주‘라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목천(牧泉) 유창균(兪昌均, 문학박사, 전 계명대 교수)





<부운재>

이미지 사진

 (부운재여름.jpg)

이미지 사진

(부운재글자.jpg)

위치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 부운재기(富雲齋記) : 부운재에 기록되어 있는 글


   우리 선조 삼재(三宰) 공(公)은 경주부 기계현 분으로 신라말에 벼슬이 아찬(阿飡)에 이르시니 우리 기계유씨의 보첩이 이로부터 시작 되었으되 휘(諱)가 전하지 않고, 산소 또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찾지 못하였던바, 숙종 4년에 후손 하겸(夏謙)이 경주 부윤이 되어 참혈을 기계답계리에서 찾아 봉축을 더하고 단표를 세우니 지금 미현동 임좌원이 여기라. 세상에서 이르기를 영남 이름난 산소중의 하나라 일컫더라. 숙종 경인년에 장헌공(章憲公) 명홍(命弘)이 경상감사가 되어 묘사 16간을 세워 부운암(浮雲菴)이라 액을 하고 승도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또 제전을 두어 시제사를 받들게 하되 가까이 사는 후손된 자로 그 일을 맡게 하고, 영조 병오년 문익공(文翼公) 척기(拓基) 순찰사가 되어 산소에 비(碑)를 세우고 그 뒤 기묘년에 또 지석을 묻고, 먼저 4년전에는 주기(冑基)가 경상도좌병사(慶尙道左兵使)가 되어 묘사를 25간으로 증축하고 정조 을묘년에는 정 효정공(孝竫公) 한모(漢謨) 경주 부윤이 되어 인근 고로에 물어 공이 사시던 옛터와 우물을 찾아 단표를 새겨 세우고 집을 지어 수호하고 그 이듬해 병진(丙辰)에는 또 허물어지는 묘사를 수리하고 순조 신사년(辛巳年)에는 산하 가까이 사는 자손들이 힘써 돈을 모으고 승도가 도와 크게 수리하니 공환(公煥), 동환(東煥)의 공로가 컷더라. 이러한 내용들이 기록된 것은 다 벽에 걸려 있노라. 순종 경술(庚戌) 후 3년 계축(癸丑)에 도유사 길준(吉濬)이 우리 아버지와 종약을 바르게 고쳐 후세(後世) 법이 되게 하였고, 7년후 경신(庚申)년에 경문장 치형(致衡)이 진철(鎭哲), 성준(星濬)과 더불어 각파의 자손들로부터 돈을 걷어 정사 12간을 다시 세우고 랑무 18간을 수리하매 석환(奭煥), 치화(致和)가 감독하여 이루고, 이때에 부운암(浮雲庵)을 부운재(富雲齋)로 고쳤더라. 22년 뒤인 신사(辛巳)년에 불초 치웅(致雄)이 억겸(億兼)과 두 번 산소를 두루 살피고 묘사가 퇴락함을 근심하여 재유사 영준(榮濬), 형식(衡植)에게 수리할 것을 부탁하여 임오(壬午)년 봄에 시작하여 정사와 랑무를 수리하고 재직실과 일랑 6간을 증축하고 또 유허비각을 수리하여 갑신(甲申)년 겨울에 이르러 준공하고 산화입은 피해목을 매각하여 그 비용를 지급하였더라. 이상이 수백년 동안에 있었던 산소 연혁의 개황(槪況)이라.


회고 하건데, 우리 선조는 이미 천여년을 넘어 지난 어른이시니 사적을 잃고, 보첩이 없어 사행이 소상하지 못하나, 자성음휴(子姓蔭庥)가 오래 미성하여 울연히 명덕거족이 되고 또 그곳 사람이 산소를 일러 유삼재(三宰)묘라 하고, 유허의 우물을 유정(兪井)이라 하고 또 지나던 다리를 유교(兪橋)라 전하여 오는 말들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후손이 영역을 봉축하고 사시던 곳을 표식하여 추모하는 생각을 펴게 되니, 향방에 음덕을 베풀고 자손에게 혜택을 머물게 안하였으면 능히 이러하리오.


무릇 후손된 자는 마땅히 조상의 덕 닦으심을 생각하여 제몸을 욕되게 함이 없을진대 오직 이 묘사는 곧 덕을 닦고 일가를 모아 돈독케하자는 곳이니, 또한 중하지 아니하리오, 이에 예전 어른들이 처음 이룩하시느라 고생하신 내력 사실을 적어 앞으로 오는 이에게 전하려고 하노니 이를 계속하여 오래 닦아 폐하지 말기를 기원하노라.


대한민국 30년 무자 가을 후손 치웅(致雄) 근기


재사 전체를 중수한지 불과 십오년에 또다시 퇴락하여 기해년 봄에 경문장(京門長) 치웅(致雄)이 발의하여 각파에 수전하여 큰 수리를 하고 정문 삼간을 또한 증축하니 경유사 동근(東根)과 재유사 영준(榮濬) 등이 이 일을 주간하여 7개월이 지나 준공하니 이 실로 자손된 이는 더없이 다행이로다. 부운재 정사가 본래 기초가 부실하여 퇴락하여 감을 걱정하던 나머지 경문장 주선으로 일본 경도에 사는 봉식(奉植)이 일금 오천이백만원을 봉납함으로써, 명지건설사장 영구(榮九)에게 공사를 위촉하여 화수헌만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철근 시멘트를 써서 구식 목조형 그 모습으로 건축하기로 하고 무오(戊午)년(1978년) 8월 16일 시공하여 동년 12월말에 준역하니 익랑 기타 건물도 동시 수리도장하다. 중문소액일기문은 경문장 글씨라, 부운재 부속건물 중 재직실, 창고, 대문이 몹시 헐어 경문장이 발의 재유사에게 위촉하여 경향 각파 문중으로부터 찬조를 받아 재직실, 대문은 수리하고, 창고는 개축 한바 임술(壬戌)년 4월 입찰 착공한 것이 한해로 인하여 추석전 겨우 준공하니 공사비로 일금 칠백육십이만원을 지불하니 유허비각 담장까지 하게 되어 일금 삼십삼만육천육백원을 지불하다.[치웅(致雄)]


※ 출처 : 부운보 제1호(1983.6.15)에서 발췌하였음. 부운재(富雲齋)는 시조 유삼재(三宰) 공의 시향을 지내고 선영(先塋)과 위토(位土)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사우(祠宇)임.


 ◎ 부운재(富雲齋) 연혁(沿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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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운교육회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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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운교육관.jpg)

위치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부운교육관)

☞  위치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282번지


○ 숙종 15년(1689) 유하겸(夏謙) 경주부윤이 관내 연세 높은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계유씨 시조묘를 찾아 그 다음해에 표석을 세움.

○ 숙종 36년(1710) 장헌공 유명홍(命弘) 경상도관찰사가 월봉(月俸)을 출연하고, 도내 종인들이 모금하여 마련된 자금으로 재사 16간을 창건하여 부운암(浮雲庵)이라 하고, 승도로 하여금 수호케 함.

○ 영조3년(1727) 문익공 유척기(拓基) 경상도관찰사가 시조 아찬공 묘비를 세움.

○ 영조31년(1755) 유주기(冑基) 경상좌병사가 종인들과 출재하여 재사 25간을 증축함.

○ 정조19년(1795) 효정공 유한모(漢謨) 경주부윤이 신라시대 유씨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에 유정이라 전해오는 우물을 찾아서 유허비와 비각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재사를 수리함.

○ 순조 21년(1821) 유공환(公煥), 유동환(東煥) 두분이 산하 자손들과 함께 모금하여 재사를 수리함.

○ 1920년 유치형(致衡) 문장이 각파 자손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정사 12간, 낭무 18간을 증축하고 부운암(浮雲庵)을 부운재(富雲齋)로 개칭

○ 1941년 유치웅(致雄) 문장, 유진오(鎭午) 도유사, 유억겸(億兼) 세분이 유영준(榮濬) 재유사로 하여금 낭무 6간을 증축하고 재사와 유허비각을 수리토록 함.

○ 1978년 일본 경도 유봉식(奉植) 사장이 본당의 화수헌 중건에 거금을 헌납함에 명지건설 유영구(榮九) 대표가 담당 준공함

○ 1984년 대종회에서 영모당 낭무 30간을 고쳐짓고 묘소를 사초함.

○ 2004년 부운교육회관(2층 74평)을 종인들의 성금과 대종회, 부운장학회 예산으로 건립함.


☞ 출처 : 부운보 제67호(‘05.10.5)




<아찬공 시조묘소 약사>


 ◎ 아찬공[휘 삼재(三宰)] 시조묘소 약사(略史)


  ○ 숙종 15년(1689년) : 휘 하겸(夏謙, 당시 경주부윤)공은 아찬시조묘소를 찾아 봉분을 쌓고 표석을 세움.

  ○ 숙종 27년(1701년) : 장헌공[휘 명홍(命弘), 당시 경상감사] 부운암(浮雲庵) 창건

  ○ 영조 2년(1726년) : 문익공[휘 척기(拓基), 당시 경상감사]께서 아찬공 시조묘소의 영역을 넓히고 봉분을 다시 쌓아서 새로이 비석을 세움.


 ◎ 아찬공[휘 삼재(三宰)] 시조묘소를 휘 하겸(夏謙, 당시 경주부윤)공이 찾은 내력


  ○ 숙종 1년(1675년) 무렵

    - 정세추(鄭世樞)가 아찬공 시조묘소 근처에 장사를 지내자 서후준(徐後駿)이 자기의 선산이라고 우기자 정세추가 이곳은 원래 유씨 선산이라고 말하자 그러면 이 고을에서 가장 오래 산 이신(李信) 이라는 팔십노인에게 찾아가 물어보자 하여 이신에게 물으니 "우리 아버지가 구십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일찍이 풍수지리에 능하여 이 무덤에 찾아와 찬탄하기를 이것이 유삼재(三宰)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 이같은 타성(他姓)들의 산송(山訟)사건을 들은 유찬(讚), 유여공(汝恭), 유여신(汝信) 등이 경주부윤(임규, 任奎)에게 아찬공 시조묘소에 대한 진상규명 진정서를 올렸으나 기각됨.

  ○ 숙종 4년(1677년)

    - 자교당공[휘 명뢰(命賚)]이 유여공(汝恭)과 함께 시조묘소를 탐문조사 후 대구 유하승[하겸(夏謙) 아우], 영천 유환(桓), 경산 유영발(永發) 등과 진정서를 준비하였으나 가형(휘 명기)의 친상을 당하여 상경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함.

  ○ 숙종 15년(1689년)

    - 경주부윤공(휘 하겸, 夏謙)이 자교당(휘 명뢰, 命賚)의 진정서를 근거로 관련자를 색출하여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게 되었고, 경주부윤공은 이러한 경위를 종중원로들께 고하여 승인을 얻은 후, 시조묘소의 봉분을 다시 쌓고 표석을 세움.

    <출처 : 원본 부묘지추심사(附墓地推尋事) - 카페 부회장 유동재(東在) 번역>



<기계유씨 시조 유허비>

이미지 사진

(시조유허비2.jpg)

위치 : 경북 포항시 기계면 현내리

  후손 한모(漢謨)가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고로(故老)들에게 물어 시조 사시던 터와 우물(井)을 기계면에서 찾아 단비를 세우고, 신라 아찬(阿飡) 유공(兪公) 유허비(遺墟碑)라 표하면서, 그 비 세운 전말을 부운재에 두었다. 그 글을 을병기사라 한다.

  을묘(乙卯) 중추(정조 19년) 불초가 이 지방 부윤이 되었는데 마침 10월 상순은 곧 기계 답계리(현 미현동) 시조산소에 해마다 지내는 시향의 날이라 하루 전에 약간의 제수를 갖추어 산하에 나가 부운암에서 자게 되었다.

  족제(族弟) 한인(漢人)이 자인 수령으로 왔으며 근읍에 사는 유성(兪姓) 가진 일가가 상하 모신분이 38명이나 되었다. 족질(族姪) 영주(永柱)가 연전 산하로 들어와 일을 살며 접대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올라와 봉심하고 행사한 후 재실에 들어와 여러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며 음복한 다음 다시 도동(현 계전동)으로 가서 선조묘소에 전작 참배하였다.


  이 산소는 곧 족(族) 대부(大父) 주기(胄基)가 좌병사로 와서 찾은바 마을 사람들이 표석 각자를 깎아버려 어느 분의 산소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유씨 선산이라고만 전해지고 있으니 혹은 고려 공진사 진경(晋卿)묘라고 말한다.


  날이 저물어 창사에 와 자게 되었다. 이 창은 기계고현으로 답계(현 미현동)와의 거리는 10리쯤 되는데 읍내 한 들판이 예로부터 신라대 유씨 세거지라고 하며 또 유씨 우물이 있다 한다. 읍내 이씨가 10여대 이 땅에서 대대로 사는 바 그 선조의 저술 가운데 또한 유씨 우물이 있다는 고치지 못할 문자가 있는 것을 보면 전설이 진실로 불상(不爽)하나 우물은 이미 인폐하였으니 듣기에 새롭고 그리울 뿐이다.


  다시 고로(故老)에게 캐물으니 한 농부가 있어 말하기를 왕년에 우연히 경작하던 밭에서 옛날 우물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봄이 되어 밭을 갈려하니 큰 돌이 튀어나와 그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물이 출렁거렸다. 물맛은 달고 상쾌하였다.


  이럴 즈음 홀연히 개인하늘에 비가 쏟아져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이 미쳐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 한다. 이런 일이 우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우물 옆에 단비(短碑)를 세워 유허비(遺墟碑)를 표하였다. 끝에 아우 한돈(漢敦)이 마침 서울에서 내려 왔기에 글씨를 쓰게 하고 각자(刻字)가 끝나 4월 1일 묘시에 입석(立石)하니 아우와 자인원이 함께 와서 밭주인 이생과 경계를 정하여 사기로 계약하고 창해로 돌아와 동족(同族)들이며 이웃 노소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놀았다. 이에 비(碑) 세운 내력을 기록해 둔다. - 후손 한모(漢謨)

☞ 출처 : 부운보 제3호(8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