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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차례)

진사공[휘 해(解)]
판도판서겸한양부윤공[휘 선(?)]
판도판서공[휘 승계(承桂)]
증 좌승지공[휘 집(輯)]
첨중추부사공[휘 기창(起昌)]
경안공(景安公)[휘 여림(汝霖)]
숙민공(肅敏公)[휘 강(絳)]



진사공[휘 여해(汝諧)]

공은 고려사에 기계유씨로는 처음으로 정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고려 고종때 『최항(崔沆, 무신정권)이 하동감무 노성(盧成)을 죽이다. 노성이 급제한 유여해(兪汝諧) 등과 더불어 시를 지어 최항(崔沆)을 비방하였다하였는데 마침내 노성(盧成)을 죽이고 유여해(兪汝諧)등을 해도로 유배시켰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제분은 5형제를 두셨는데 장남 형무(逈務)는 관(官)이 사재주부 동정이요, 3자 득선(得瑄)은 관(官)이 상승국부내승 추봉좌복야이며, 5자 득주(得珠)는 주부(主簿)이다.
그러나, 현재 묘소는 실전되었다.


봉익대부 판도판서겸한양부윤공[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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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판서겸한양부윤(휘선)묘소전경, jpg)
위치 : 경기 평택시 청북면 후사리

- 의의 : 시조묘(아찬공) 다음으로 실존하는 묘소임.

※ 부윤(府尹) : 종2품 문관의 외관직(外官職)으로, 관찰사와 동격이다.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함경도 영흥부(永興府:뒤에 咸興府),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의주부(義州府)에 두었다. 이 밖에 한성부 ·수원부 ·광주부(廣州府) ·개성부 ·강화부의 장은 부윤이라 하지 않고 판윤(判尹) ·유수(留守)라 하였으며, 외관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이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八道制)를 없애고 전국을 23개의 부(府)로 나누어, 부윤제를 없애고 관찰사가 부의 장이 되었다


봉익대부 판도판서공[휘 승계(承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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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판서공(휘승계)묘소전경, jpg)
위치 : 경기 안성시 금광면 한운리

※ 판도판서(版圖判書) : 고려(高麗) 중엽의 관직의 하나. 판도사(版圖司)의 으뜸벼슬. 31대 공민왕 11(1362)년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고친 이름. 뒤에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고쳐졌다가 조선(朝鮮) 시대(時代) 3대 태종 때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됨



판사재감사공[휘 성복(成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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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재감사(성복)묘소전경1, jpg)
위치 : 경기 안성시 금광면 금광리

- 묘소 : 경기 안성시 금광면 금광리 일명 배어리(금광저수지 건너편)에 뫼셔져 계서 묘소 참배시 저수지를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참배시 안성지역종친회(회장:유장근,莊根)의 협조를 요청하여야 함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 고려시대 통훈대부, 정3품 벼슬, 고려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해산물(海産物)과 하천(河川)의 교통을 맡아본 관청인 사재시(司宰寺)의 수장. 본래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라고 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사재감(司宰監) 등으로 고치면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명칭하였다. 1372년에 다시 사재시로 환원되어 그 수장을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라고 하고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증 승정원 좌승지공[휘 집(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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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공묘소전경, jpg)
위치 : 경기 안성시 사곡동

※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좌승지는 정3품벼슬.

 

첨중추부사공[휘 기창(起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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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묘소,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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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신도비.jpg)
위치 :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정사(丁巳)년 세종19(1437)에 출생하시어 갑술(甲戌)년 중종9(1514)에 졸하셨으며 공은 무과급제 출신이며 관은 첨지중추부사이시며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 청절사에 뫼셔져 계십니다. 묘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재실(齋室)은 동재궁(東齋宮)이라 함)에 계시며 관리는 현재 충남 서천군 판교, 비인일가님들의 정성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공은 세종19년 정사(서기1437년) 홍성 노은동 내포 외가(박첨)에서 유복자로 출생하여 성삼문가와 외가에서 살았는데 서기 1356년 세조2년 단종복위 사건연루로 성삼문가와 박첨가가 모두 도육(屠肉)을 당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0세였는데 할수없이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를 모시고 비인의 처가 능성구씨댁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공은 정직함으로써 연산조난정에 간쟁하는데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사적에 대하여 역사서 연려실기술에는 유기창(起昌)공은 기계인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구읍(九邑)의 수령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을 때 연산의 난폭한정치를 간하다 영의정 성준의 잔당으로 몰려(연산10년 갑자사화) 거제에 유배되었다. 그때 같이 유배된 이가 세 사람이었는데 매양 서로 의지하여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 보았다.
하루는 연산의 명을 받아 김오랑이 급히 달려와 그중 한사람을 죽였다. 얼마후 다시와서 또 한사람을 죽였다. 이제 남은이는 공뿐이다. 공은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는 바다를 건너 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인들을 불러 작별을 하려하는데 그 사람은 중종대왕이 연산군(연산12년 9월)을 몰아내고 반정을 했다는 기별을 전해왔다. 또 새임금 중종은 기창(起昌)공에 병조참의의 벼슬을 제수하고 아들 여림(汝霖)에게 한림의 벼슬을 내렸다 했다.
공은 서신을 보고 옛임금 연산군을 위해 통곡했다. 또 아들 여림(汝霖)에겐 답서를 보내어 너는 새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라 했다. 공은 비록 연산군에 의해 귀양살이를 했을망정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의리를 지켜 홍언충 김숭조 남세주등과 더불어 연산조 4절신의 한분이 되었다.
그후 공은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하고 무의의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중종9년 갑술 10월4일에 졸하니 향년 78세라 유명으로 신주에 옛직함 첨지중추부사만 쓰라고 했다. 졸후 나라에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예문관제학을 추증하고 숙종46년 경자년에는 강호의 사림들이 공의 청덕을 사모하여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통박동에 청절비를 세우고 아들 여림(汝霖)과 함께 향배 춘추제향을 올리니 공의 청절이 천추만대에 빛나도다. 공의 묘도 비인 판교에 뫼시었다.

아버지 휘 해(解)공은 진사로 24세에 조졸하였는데 이 어른이 바로 성승과 동서간이다. 그러므로 휘 기창(起昌)공은 사육신 성삼문과 이종사촌이 된다. 공은 아버지 진사공(휘 해, 解)과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입신하여 집안의 중흥을 이루었다.


[경안공(景安公)][휘 여림(汝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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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공(휘여림)묘소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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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공신도비.jpg)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리

병신년 성종7년(1476)에 출생하셨으며 무술년 중종33년(1538)에 졸하시였으며 호(號) 정당(政堂)이며, 1498년(연산 4년) 사마시(司馬試), 1504년(연산10년) 식년문과(式年文科)병과 장원 급제하셨으며, 예조판서 경안공(景安公) 유여림(汝霖)은 조선조에 기계유씨의 중흥조로 학문과 절의 도덕과 큰 국량으로 기계유씨 집안을 크게 빛냈다.
공의 자는 계옥(啓沃, 啓玉)이요 호(號)는 정당(政)이다. 고(考)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諱) 기창공(起昌公)이요 비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성장하며 품성이 영민(英敏)하고 학문에 힘써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부인(貞夫人)은 창녕성씨인데 교리 휘(諱) 희의 손녀다. 휘(諱) 성희공은 성삼문공의 당숙으로 단종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성삼문공이 휘 기창(起昌)공의 이종사촌임을 감안할 때 창녕성씨와 혼사는 대대로 연줄관계에 있었다. 더욱이 휘 기창(起昌)공이 말년에 거제로 유배되어 간 것도 영의정 성준공사건에 연계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 집안은 공사간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휘 기창(起昌)공이 거제에 유배된 것은 연산10년 갑자사화 때 인데 29세의 경안공(景安公)은 아버지 기창(起昌)공을 모시고 거제까지 갔었다. 이해 12월 공은 문과 급제하여 바로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고 이듬해에는 검열, 주서, 대교가 되었다. 연산조 12년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실각했다. 새임금 중종은 즉시 휘 기창(起昌)공의 유배를 풀고 병조참의의 벼슬을 내리니 경안공(景安公)이 서신으로 이 소식을 급히 거제에 알려 드렸다. 그러나 휘 기창(起昌)공은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치셨고 다만 아들 경안공(景安公)에게 이르기를 너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훈교했다.
경안공(景安公, 휘 여림)은 벼슬길에 나서 성균전적, 전직강, 사간원종사관, 의정부사인 단양 한산군수등을 거쳐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시강원보덕, 홍문관직제학.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중종14년 을묘 공44세때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정암 조광조선생과 더불어 나라일을 바로잡기 위해 직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명현들이 희생되거나 귀양가고 (조광조, 김정, 김구, 김사, 기준, 정완, 한충) 경안공(景安公)은 파직되어 비인으로 칩거했다.
이듬해 중종대왕이 크게 후회하여 경안공(景安公)을 선위사로 삼았다가 동부승지 병조참의에 승진시켰다. 중종18년 전라관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등을 거쳐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공 55세 조정의 육경을 거느리고 권신 김안노 오국의 죄를 논박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비인에 유폐되었다.
마침내 7년의 유폐생활 끝에 중종32년(서기 1537년)에 다시 등용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정치보복을 반대하여 더욱 덕망을 얻었다. 당시 조정의 공론이 장차 정승으로 특배되리라 했다. 이와같은 시기에 공은 63세를 일기로 중종33년 무술 1538년 10월2일에 하세하시니 임금이 놀라워하시고 3일간 정사를 폐하였다. 또한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으며 중종은 경안공(景安公)의 시호와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대제학을 추증하였으며 고양 관산리에 장사지냈다.
※ 경안공 신도비는 선조19년(1586년) 공의 손 좌의정(휘 홍, 泓)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건립되었으며 신도비각의 건립은 대종회가 고양군의 일부예산을 지원받아 준공되었다. 영의정 홍언필은 공의 신도비명에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사람됨이 장중하여 집에서는 효제의 도리를 다하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공경의 의무를 다하였으며 사려는 치밀하고 처단은 정확하여 좋은 자리의 내직과 참판 판서등을 두루 거쳤으나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고 찬하였다. 공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았으며 묘제 김안국과 우의가 두터웠으며 하서 김인후는 공을 따르던 후배중의 한분이다.
※ 저서에는 정당유고가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이름을 빛낸 기계인은 거의가 공의 후손인 까닭에 기계유씨의 중흥조라 일컫는다.(자손중 3정승 12판서 백인이 문과급제하였다.) 당유고는 소문(疏文)이 주문을 이루며 부록으로 숙민공(肅敏公, 휘 강, 絳)의 유고도 있으며 구한말 송병선, 권응선, 신응선 등이 서문을 쓰고 후손 필환, 치원, 치형(致衡), 치옥등이 발문을 썼다. 근자에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숙민공(肅敏公)[휘 강(兪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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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민공 묘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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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민공신도비(차산리).jpg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중종36(154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급제

중종5년(1510) 경오년 11월 경진일생으로 신묘진사 신축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인조, 명종, 선조 4대에 걸쳐 승지, 오도관찰사 공조,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셨으며 경오 4월초 10일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졸하셨으며 숙민공(肅敏公) 시호를 받으시고 함경도 문회서원에 향배되었다.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관로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을 탄핵하다 여러지방의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는데 윤원형이 죽은 뒤 한성 판윤 공조, 형조,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30년 입조에 한번도 권세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다"라는 말로 자손들에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교훈은 남겼다.
또한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關西)의 유생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3년(1570)년 경오년에 공졸 후 영의정 권철(權轍) 영의정 홍섬(洪暹) 영의정 박순(朴淳) 대제학 박충원(朴忠元) 이조판서 이기 등 공의 생전 막역했던 동료 후배들의 간곡한 주청과 주선으로 양주 차산리 경기내의 명산 차유령하에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에서 내려준터)에 공의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선조 17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월사 이정구가 비문을 짖고 글씨는 현손 황(榥)이 썻으며 수북 김광현이 전했다.
경기도 관찰사 재임중에는 실전했던 고려말 3대선산을 평택, 안성 등지에서 확인하여 봉축하셨다. 전종중의 성금으로 1987년 정묘11월에 재실 양효재가 준공되어 장엄한 재실로 공의 유택을 수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