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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집성촌 소개
기계유씨 세거지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경기도 하남시 산곡동
경기도 남양주시 차산리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경기 고양시 일산구

충북 보은군 탄부면
충남 연기군 서면
충남 서천군 서면
충남 서천군 비인면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울산광역시 두동면
울산광역시 삼남면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전남 완도군 금일읍
전남 무안군 해제면

 

주요 집성촌 소개

<기계유씨 세거지>

기계유씨 상계(上系)의 세거지라 하여 시조의 유허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상계에서는 대대로 경북 포항시 기계고현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유여해공의 뒤인 유형무(逈務)공의 자손들(동정공파)은 유성공의 후계가 충남 연기땅을 세천지로 지키고 있으므로 그곳에 세거했던 것 같고 유선공의 아우인 유신공의 후계는 개성과 양주, 충주 중원 음성 등지에 산거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유형무(逈務)공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유동로공의 후손 일부는 충남 당진에 정착하였던 것 같다.

○ 전서공파는 일부가 유천경(千慶)공의 6대손 유영공의 대를 전후하여 전북 익산에 유천경(千慶)공의 7대손 유사달공 유사원공의 대 이래로 충남 논산, 경남 울산, 언양 등지에 유천경(千慶)공의 증손, 유세걸공 이래로 경북 영일의 오천 등지에 세거의 터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군기시사공파의 유성리(成利)공의 손자인 유효통(孝通)공의 후손은 경기, 충청도 일원과 영남 등지에 유효전공, 유숙생공, 유원기공의 후손들은 충남 논산, 부여, 황해도 해주, 전남 함평 등지에서 세거하였던 것 같다.

○ 부정공파의 유성보(成保)공의 자손들은 충남 천안, 천원, 경기도 평택, 화성 일대에 살고 있으며, 또 전북 완주를 중심으로 해서 크게 취락을 이뤄 살았던 것 같다.

○ 판도판서 유승계공의 넷째 아들인 유성복(成福)공의 자손들은 가장 번창하여 유성복(成福)공 이래로 8개파(부제학공파, 통덕랑공파, 학생공파, 자산공파, 진사공파, 충목공파, 단성공파, 신계공파)가 갈라졌으며 기계유씨의 70%이상을 차지하여 전국 일원에 산재해 살고 있으며 특히 서울, 경기 안성, 광주, 하남, 고양, 충북 진천, 보은, 충남 서천, 부여, 청양, 강원도 춘천 등지와 경남도, 전북도 등 전국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 한편 주부공파은 유득주(得珠)공의 아들 유연공의 대 이래로 경북 고령에서 살다가 일부가 경남 거제에 옮겨가 살았고 그 밖에 현풍, 합천 등지에 일부 자손들이 살았던 것 같다.

○ 월성군파인 유승추(承樞)공의 자손들은 경기도 포천 등지와 함경도 지방에도 살고 있던 것 같다.
○ 장사랑공파의 유호인(好仁)공의 자손들은 경남 함양 등지에 살고 있다.

☞ 출처 : 부운보(富雲報)에 실렸던 「기계유씨 통사」에서 발췌 「하산 유동준 記」

하지만 현재는 옛날 선조들이 살았던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 등 대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신미 대동보(1991년) 지역별 배포 현황을 참조하시면 어느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① 서울지역 2,455부, ② 경북·대구 995부, ③ 경기·인천 947부, ④ 충남·대전 922부, ⑤ 전남·광주 661부, ⑥ 경남·부산 488부, ⑦ 충북 367부, ⑧전북 268부, ⑨ 강원도 186부, ⑩ 제주 65부, ⑪ 미국 25부, ⑫ 일본 15부 등이며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북한에도 상당수의 기계유씨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경기 하남시 덕풍1동 역말

역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역촌(驛村)→ 역마을→역말로 변하여 굳어진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대화경금속주식회사가 있었으 나, 현재 그 자리에는 현대아파트가 세워졌으며 바로 옆에는 쌍용아파트가 들어와 있어 유입인 구가 많이 늘었다. 기계 유씨의 집성촌이었다.


■ 경기도 하남시 산곡동 - 기계유씨 '산골유씨' 마을.

지금은 경기도 하남시로 통합되어 있지만,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그리고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가 위 아래 마을로 하여 우리 유씨의 최대 집성촌이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200여 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고향을 많이 떠나서 서울 그리고 하남시에 살고 있습니다.
충목공[휘 홍(泓)]할아버지가 나라에 세운 공으로 이 곳의 땅과 노비 그리고 비단을 하사받으셨습니다. 그 이후 충목공할아버지 손자들이 세거하면서 관산리에 있던 충목공의 묘소도 이장하고 지금까지 거의 400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일가간에 20촌 가까이 벌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일가가 살고 있습니다. 이장은 한번도 타성에게 넘겨준 경우가 없고 국회의원도 유기준 의원, 유성근 의원을 배출한 우리 유씨의 철옹성입니다. 우리 유씨를 이곳에서는 산골유씨(원래는 산곡인데 골 곡자를 쓰기 때문)라고 하는데 모든 군민이 머리좋고 훌륭한 집안이라고 인정하는 곳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上山谷洞)은 조선조 때는 이곳이 동부면 산곡리였었다. 일제가 강점후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산곡리의 대성(大姓)이며 조선조의 명문가인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세력을 분리하기 위하여 이곳을 중부면에 귀속시키고 위쪽의 산곡이라 하여 상산곡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 부락은 가지울, 거문다리, 굽들이, 동수막, 섬마을, 어둔이골, 하다리골로 형성되었다.
“가지울(가지동)”은 상산곡동의 깊은 골짜기의 명칭으로 산골짜기가 나무가지 마냥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거문다리”는 현교(玄橋)라고도 한다. 검단산 그늘에 늘 늦게 밝아지므로 이 다리는 어둠침침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굽들이”는 말굽모양 내가 흐르는 들로 기름지다하여 굽들이란 이름이 붙었다.
“동수막”은 이 곳엔 원(院)이있었다. 원이란 옛날 길손들이 쉬어가던곳으로 정부가 세운것을말한다. 후에 원이 없어지고 주막이 생겨 동수막이라 부르게 되었다.
“섬마을”은 산곡천이 흐르고 또 가지울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하여 마치 섬과 같다하여 이르는 마을임.
“어둔이골”은 병자호란때 효종 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어둔(御屯)골이란 뜻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원군들이 검단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격전지로도 알려진다.
“하다리골”은 이 곳에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을 피워 밝히는 초당불이 있는데 이곳만이 유난히 빛을 비추어 화달(火達)골이라 하던 곳이 변음 된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下山谷洞)은 상산곡동의 대칭어로 산곡리가 갈라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상산곡이 중부면으로 편입될 때 동부면이 되었다. 하산곡동은 새능, 고양골, 마근대미, 거릿대울, 부대앞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 되었다.
“고양골(高陽谷)”은 지형에 의해 붙혀진 이름으로 지대가 높고(高) 양지바르다(陽)라는 뜻이다.
“새능”은 조선 선조 공신인 충목공(유홍, 兪泓, 官 좌의정)의 묘가 마치 능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후손이 칩거한다.
“마근대미”는 막은덤이의 변음으로 이곳의 지형이 산곡천의 지류가 유입되고 있으나 산세가 꽉 막고 있는 것 같은 지형으로 큰 더미가 막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릿대울”은 거릿대란 거룻대 즉 거룻배의 삿대를 뜻하는 것으로 이곳은 검단산의 맹수가 자주 내려와 피해가 커 거룻대 같은 큰 나무로 올을 치고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검단산의 영물이 가끔 그 영험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부대앞”은 이곳은 검단산 산기슭이었는데 미군 부대가 들어오면서 생긴 부락이다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차산리는 고종의 능을 안치할 장소로 물색되었던 곳이기도 한데 그 자리가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다. 화도읍 차산리 775-4번지에 있는 숙민공(肅敏公)[휘 강(絳)], 이하의 후손인 자산공[휘 영( 泳)], 선무랑공[휘 대의(大儀)], 승지공[(휘 헌(櫶)], 등과 기계 유씨 선조 9기의 묘가 세 곳에 위치해 있는데 타원형으로 늘어진 모습이 어머니의 젖가슴모양이다. 차산리에서 많은 인물이 나온 이유도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이 기운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문 삼감사(一門 三監司)라 하여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둘이 감사를 지낸 적이 있는데 묘의 위치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의 삼감사 묘는 감사공(휘 성증(省曾)), 충간공[휘 황(榥)], 대사헌공(휘 철), 군수공(휘 희증) 등 벼슬을 했던 네 분의 묘를 시작으로 하여 네 줄기로 뻗어 있는데, 각각 후손들의 묘를 차례로 산 전체에 모신 전형적인 사패지(賜牌地)이다. 묘를 모신 산의 정면으로는 운길산이 보인다. 재실은 최근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원차산리 일대에는 지금도 많은 기계 유씨들이 살고 있다. 그러면 기계유씨는 언제부터 이곳이 정착하게 되었는가? 아래는 남양주에 세거해온 주요 가문들의 입향시기 이다.

<남양주 각 성씨별 입향 시기>

 

차산리라는 지명유래는 차산리에 있는 고개인 '차유령(車踰領, 수레 넘이 고개)'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3) 4월 10일 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유강(兪絳)이 돌아가시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兪省曾)공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숙민공(肅敏公)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 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車踰嶺)'또는 '수레넘이고 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경기 안성 일죽면 상산전(上山田)마을

일명 웃산전리 마을이라고도 한다. 신라때 기계유씨(杞溪兪氏) 유재인(兪在仁)공이 이곳에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신라시대에 축조된 금산산성(김유신 장군이 쌓은 성이라고 함)아래에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산전(山田)이라 하다가, 금산리 4개 마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산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 경기 안성 금광면 옥정리 매남 마을

현재 옥정리(玉井里) 매남동(梅南洞)이며, 일명 매남이, 옥쟁이, 제비안말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에 형상이 매화꽃 같다고 매남이라고 불려지는가 하면 진천의 장꾼이 와서 주막에서 쉬어갈 때 우물물의 맛이 좋다고 해서 '옥쟁이'라 하다가 '옥장이'라고 불려졌으며, 또한 뒷산의 형상이 제비가 날아가는 형상이라고 해서 '제비안골'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은 본래 청주한씨가 거주하였으나 약 350년 전쯤부터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유대록(兪大祿)공이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지 바른 곳에 매화가 많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매남'이라고 하며, 제비집의 모양처럼 생긴 마을이라하여 '제비안말'이라고도 한다. 이곳출신으로 현달한 주요인물로는 전라감사를 지낸 유석증과 승지를 역임한 유진증(晉曾)이 있고, 근세에는 한국최초의 미생물학박사인 유일준(日濬)을 들 수 있다.

■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성은리

입향시기는 숙종때인 350여년전에 금강면 옥정리 유대록(兪大祿)공의 현손인 유만기(兪萬基)공이 이곳으로 먼저 이주한 둘째 아들이 사망하자 그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들어왔다가 세거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주요인물로는 조선말기 좌찬성을 지낸 유진오(兪鎭五)가 있다. 그의 묘소는 남양주 차산리에 소재한다.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 두교리 대근
조선조 시대에는 이곳에서 충청도로 부터 올라오는 세금(곡물)을 계량하였는데 빠짐없이 검수하려고 이 마을다리에서 개량하였다하여 두교리라 한다.
충청도로부터 올라오는 세금(곡물)을 계량 검수하였는데 빠짐없이 검수하려고 이 마을다리에서 계량하였다 하여 사근다리라고 한다.
죽산면 두교리는 조선 시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세금(곡물)을 계량 검수하는 장소였는데, 다리 위에서 양을 재었다고 해서 '말 두', '다리 교'자를 써서 두교리가 되었다. 두교리 몇 개 마을 중에 댓골, 용대골 이라 불리는 산골 마을이 있다. "댓골은 골이 큰 곳이라고 큰 '대', 골 '곡'자를 '대곡'이라 부르다가 '댓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원래는 이 댓골에 정착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데, 분가해서 살 게 된 사람들이 고개 너머 용대골에 살면서 댓 골과 용대골에 펴져 살 게 되었지."라며 마을의 유래를 말씀하시는 유웅열(81세) 할아버지는 당당한 풍채에 수염을 멋지게 기르셨다.

3 백년 가량으로 추정되는 오랜 옛날 전주 이씨들이 댓골과 그 산 너머 아와실 산골에서 흩어져 몇몇이 살고 있는 마을에 고작골(율면)에서 살던 기계 유씨가 약 1백 50년 전 들어와 전주 이씨와 기계 유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각성바지 마을이다.

댓골의 앞산은 닭모이라고 부르는데 그 언덕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요란했다는 곳이다. 용대골은 큰 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쪽의 산이 용의 머리에 속하고 마을에서 바로 뵈는 앞산이 몸통과 꼬리까지 용 모양을 하고 있는 곳인데, 지금은 산업단지가 생기는 바람에 용의 머리 부분과 그 골짜기에 속하는 사기 장골이 없어지고 말았다.
☞ 출처 : 안성시청 '안성 읍면동 안내'

■ 경기 고양시 일산구 덕이家

덕이동 한뫼(일산)일대는 참판공[휘 대정(大禎)] 후손들이 세거하여왔던 곳으로 참판공(휘 대정, 大禎)이 고양 일산의 덕이동에 세거한 이래 선조조부터 고종조까지 후손들의 관계 진출상황을 살펴보면, 필선(弼善), 군수(郡守), 전적(典籍), 부윤(府尹), 승지(承旨), 예판(禮判), 좌찬성(左贊成), 동돈령(同敦寧), 부사(府使), 형판(刑判) 등 출사자 15인(음직 포함), 생원진사시 합격자 4인, 증직 4명으로 합계 23인을 배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만성통보 2343~2344쪽. 중복자를 제외한 수치).
더욱이 당색이 기호남인(畿湖南人)이었음에도 이 정도의 인물을 배출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곳 고양에 함께 입향한 첨추공(휘 대희, 大禧)가와 함께 17세기 후반기부터 18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양가의 후손들이 당시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의 여주이씨 가문과 혼반을 맺은 사실은 앞으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성무, 李成茂,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조선시대사학보" 3 (조선시대사학회, 1997) 게재, >

■ 충북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林閑里)

면적은 1.52㎢, 인구 72가구 160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3㎞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마로면(馬老面), 서는 하장리(下長里)와 상장리(上長里), 남은 구암리(九岩里), 북은 외속리면(外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옛 조선시대 상주목(尙州牧)의 임언부곡(林堰部曲)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뒤에 보은군(報恩郡) 왕래면(旺來面) 관할지역으로서 숲이 많으므로 임한이 또한 임한(林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임한리(林閑里)라 해서 탄부면(炭釜面)에 편입되었다. 임한(林閑, 임한이) 마을 숲이 많이 우거졌다 하여 임한이라 하였다. 문화유적으로 경모재(景慕齋)와 임천정(林泉亭)이 있는데 기계유씨(杞溪兪氏) 문중의 재실과 제각이다. 1958년에 건립한 재실 경모재는 전면 4칸반, 옆면 1칸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병찬(炳瓚)의 “경모재기”와 1967년 병수(炳壽)가 쓴 “경모재찬시”가 편액되어 있다. 제각인 임천정은 전면 4칸 옆면 2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1959년에 채기연(蔡基演)이 짓고 병극(炳極)이 쓴 ‘임천정서'가 편액되어 있다. 또한 기계후인유병찬씨영세불망비(杞溪后人兪炳瓚氏永世不忘碑)가 있는데 1936년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로 아랫말에 있다. 당운유창식선생공적비(塘雲兪昌植先生功績碑)는 육영사업과 치수사업 등 공적을 기리는 비로 면민들이 1990년에 세웠다. 충목공송당유선생광국사적비(忠穆公松塘兪先生光國事績碑)는 선조때 좌의정(左議政) 유홍(兪泓)의 광국훈공(光國勳功)의 사적을 기록한 비로 1998년 후손들이 숲속에 세웠다. 또한 산신제는 마을앞 숲속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열나흩날 산신제를 거행하고 있음.
집성촌으로 기계유씨(杞溪兪氏) 좌의정(左議政) 충목공(忠穆公) 유홍(兪泓)의 후예 2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 충남 연기군 서면의 동정공파 집성촌.

충남 연기군 서면의 동정공파 집성촌에는 예전에는 많게는 500여호까지 살고 있었으며 근래에 와서도 300여호가 살고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충남 연기군 서면 국촌리는 현재 50여호 정도의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충남 연기군 서면 외촌리에도 현재 60여호가 살고 있는데 모두가 동정공파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곳 주민들은 타성이 들어와 살게되면 대환영을 하면서 같이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그들이 오래 살지 못하고 스스로 이사를 간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11.2일 기계시제에서 산에 올라가지 못하시는 동정공파 일가이신 외촌리에 살고 계시는 평준(平濬)대부님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유섭 카페대의원회장>

■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조선시대 이전(朝鮮時代以前)에는 인적이 드물었던 해안지대였다. 비인현(庇仁懸)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西面)이라고 불렀으나 그 보다 조선시대 세종(世宗) 이후에는 도두음곶(都豆音串)으로 알려졌던 지역이다. 부락의 형성도 고려시대로 보며 집성부락 즉 씨족이 모여 사는 부락의 형성은 400년전으로 주축하는 지역이다. 1600년 후반기부터 수군의 진영 즉 마량진(馬梁鎭)이 태동되면서 갑자기 급속도로 정착인구가 늘어났던 지역이다. 마량리는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말기 효종(孝宗) 7년(1656)에 남포현에 있던 마량진을 이곳에 옮겨 왔으므로 마량진 또는 마량이라고 부르게 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마량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집성촌이 있으며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집성부락도 있었다.<자료제공: 서천군 웹싸이트>
이 일대에는 저와 같은 기계유씨 신계공파가 주로 살고 있어요. 그곳의 자세한 위치는 동백꽃이 유명한 동백정이 있고, 서천 화력 발전소, 해양박물관등 있어요 <자료제공:유재성 카페홍보위원>


■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옛날부터 명문이 낙향하여 자리를 정한다 해서 비인(庇仁)이라 불러오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비인면이 되어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면내에 거주하는 성씨의 대성은 밀양박씨(密陽朴氏) 110여세대를 비롯하여 평산신씨(平山申氏) 100여호 강릉유씨(江陵劉氏)90여호 기계유씨(杞溪兪氏) 60여호, 능성구씨(陵城具氏) 40여호, 창녕조씨(昌寧曺氏) 40여호가 대성을 이루며 거주한다.
남당리 비인군 북면(北面)의 지역으로서 남쪽을 향한 전원이 밝은 곳이라 하여 남당(南塘)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남당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가 뿌리를 내리고 많이 살며 그 집성부락도 있다.<자료제공:서천군 웹싸이트>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월막동 삼막리

경북 고령군 쌍림면 월막동 삼막리에 기계유씨가 살게된 것은 지금부터 약200여년전에 석환(錫煥)공 할아버지께서 선홍에서 삼막큰골로 이주 하면서 부터였다. 석환공은 주부[휘 득주(得珠)공], .좌찬승(휘 탄)공, 가선대부(휘 경민)공의 자손이며 탄공의 17대 손이며 경민공의 7대 손이다. 지금은 석환공의 5세손(炳) 6세손(在) 7세손(善) 약200여명이 각계각층 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20여명의 의사가 국내외에 의료계에서 인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몇 세대만이 그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울산광역시 두동면 이전리 양지마을

입향조는 군기시사공파의 파조인 '성리(成利)'공의 6대손인 호조(戶曺) 별제(別提) '상(祥)'公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울산 염포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 곳(신라 충신 박제상의 전설이 어린) 치술령下 토지가 비옥하고 양지쪽인 이전리(泥田里) 양지(陽地)마을에 복거(卜居)하였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개기(開基)시 산림이 우거져 다래덩굴을 쳐내고 샘을 파니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샘솟아 이를 유정(兪井)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지금도 물맛이 좋아 울산시내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고 있다. 그 때 터를 잡아 지은 집이 임진고가(壬辰古家)이다. 애석하게도 작년에 헐렸다. 입향조의 아드님이신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공 묘비문의 찬(讚)을 인용하면

致述嶺下(치술령하) 泥田里(이전리) 杞溪兪氏(기계유씨) 土姓村(토성촌)
敬文先生(경문선생) 入鄕地(입향지) 鑿耕開基(착경개기) 子孫繁(자손번)
百世一室(백세일실) 宗中箴(종중잠) 家風自守(가풍자수) 暢達門(창달문)
追遠先祖(추원선조) 不變禮(부변예) 子孫萬代(자손만대) 餘慶多(여경다)

성세시 두동면 이전리등 삼동과 두서면 구량리 일원에 100여호가 살았으나 이농 현상으로 불과 수십여호가 400여년간 선산을 지키고 있다.



■ 울산광역시 삼남면 교동리 작하마을

입향조는 전서공파의 파조인 '천경(千慶)'公의 7대손인 '대신(大信)'公으로 임진왜란후 혼란기에 상북면 향산리에 입향하여 잠시 살다가 삼남면 교동리 작하마을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 곳은 영남의 알프스인 신불산下 작괘천이 흐르는 글자 그대로 산천이 수려한 곳으로 '작천정'과 언양 향교가 있어 옛부터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성세시 삼남면 작하마을 일원에 100여호가 살았으나 도시화, 이농화로 언양, 부산, 울산 일원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입향조를 봉사하는 재실(齋室)인 '화수당(花樹堂)'이 있다.
지금도 작하마을 등 삼남면 일원에 수십여호가 살고 있으며 후손들이 선산을 수호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몇년전엔 광주광역시 광산구였는데 현재의 행정구역은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입니다.
지금은 기계유씨 분들이 많은 분들이 살지는 않지만 옛날에 50여호 이상 기계유씨 부제학공 광산문중의 후손분들이 사셨습니다.
이곳은 고싸움(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의 마을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故 유근춘(근자항렬)형님이 무형문화재 전수자였습니다.
입향조는 조선 순조때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에서 감찰공(휘 영환, 사헌부 감찰)께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 전남 완도군 금일읍 사동리

조선시대 인조 때에 밀양 박씨 박재룡이 장흥 대덕에서 행상을 하다 처음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안동 권씨, 기계 유씨 등이 이주하여 왔으며 현재는 기계유씨(부제학공 후손)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지명 유래는 섬 앞바다의 물결이 항상 잔잔하여 소랑이라는 설과 섬 모양이 소라같이 생겨서 소랑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설이 있다. 소랑이라는 말은 소라의 사투리이다. 다시마가 특산물로서 인기가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도서백서(발행 : 내무부 / 연구 및 편집책임 : 신순호)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 장동


마을이 처음 이루어 졌을 때는 장곡이라 불렀는데 뜻은 소의 씩씩함을 뜻한다고 한다. 현재 마을이 있는 곳은 소의 배 부분에 해당되며 소가 이 마을을 감싸는 형태라 하며 행정구역 개편시 장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기계유씨'이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난을피해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현재는 기계유씨, 광산김씨, 여양진씨등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