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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및 시조
기계유씨 약사
중시조
대종회 주관 선대시향 일정
파계도
주요집성촌 소개
문중을 빛낸 선현
  전체
1400~1573
1576~1674
1684~1798
1800~1992
대동보 약사
찾아오시는길
 
 
 
유여해(兪汝諧) 생몰미상
유여주(兪汝舟) 1476 ~1538
유효통(兪孝通) 생몰미상
유응부(兪應孚) ? ~ 1456
유 진(兪 鎭) 생몰미상
유기창(兪起昌) 1437 ~ 1514
유호인(兪好仁) 1445 ∼ 1494
유여림(兪汝霖) 1476 ~ 1538
유백온(兪伯溫) 1492 ∼ ?
유 강(兪 絳) 1510 ~ 1570
유 홍(兪 泓) 1524 ~ 1594
유 영(兪 泳) 1525 ~ 1585
유대수(兪大脩) 1546 ∼ 1586
유대기(兪大祺) 1547 ∼ 1615
유대의(兪大儀) 1549 ∼ 1593
유대정(兪大禎) 1552 ~ 1616
유대진(兪大進) 1554 ∼ 1599
유대칭(兪大?) 1565 ∼ 1634
유대일(兪大逸) 1572 ∼ 1640
유호증(兪好曾) 1533 ~ 1615
유석증(兪昔曾) 1570 ∼ 1623
유진증(兪晉曾) 1573 ∼ 1625
유성증(兪省曾) 1576 ∼ 1649
유수증(兪守曾) 1578 ∼ 1636
유무증(兪懋曾) 1580 ∼ 1659
유선증(兪善曾) 1583 ~ 1653
유백증(兪伯曾) 1587 ~ 1646
유 경(兪 경) 1599 ~ 1646
유 황(兪 榥) 1599 ~ 1655
유 철(兪 ?) 1606 ~ 1671
유 계(兪 棨) 1607 ∼ 1664
유 헌(兪 櫶) 1617 ∼ 1692
유명윤(兪命胤) 1629 ∼ 1669
유하익(兪夏益) 1631 ∼ 1699
유하겸(兪夏謙) 1632 ~ 1691
유명일(兪命一) 1639 ∼ 1690
유명뢰(兪命賚) 1652 ~ 1712
유명웅(兪命雄) 1653 ∼ 1721
유명홍(兪命弘) 1656 ∼ 1729
명건(兪命建) 1664 ~ 1724
유명집(兪命集) 1665 ~ 1733
유명악(兪命岳) 1667 ~ 1718
유상기(兪相基) 1651 ~ 1718
유광기(兪廣基) 1674 ~ 1757
유우기(兪宇基) 1684 ~ ?
유최기(兪最基) 1689 ~ 1768
유척기(兪拓基) 1691 ~ 1767
유숙기(兪肅基) 1696 ~ 1752
유언명(兪彦明) 1666 ∼ ?
유언철(兪彦哲) 1687 ~ 1744
유언술(兪彦述) 1703 ~ 1773
유언지(兪彦摯) 1706 ~ 1776
유언민(兪彦民) 1709 ~ 1773
유언집(兪彦鏶) 1714 ~ 1783
유언현(兪彦鉉) 1716 ~ 1790
유언호(兪彦鎬) 1730 ~ 1796
유한소(兪漢蕭) 1718 ~ 1769
유한갈(兪漢葛) 1722 ~ 1795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유한인(兪漢人) 1741 ∼ 1808
유한녕(兪漢寧) 1743 ~ 1795
유한지(兪漢芝) 1760 ~ 1834
유만주(兪晩柱) 1755 ~ 1788
유병주(兪秉柱) 1778 ∼ 1840
유화주(兪華柱) 1797 ∼ 1860
유성환(兪星煥) 1788 ~ 1849
유세환(兪世煥) 1796 ~ 1878
유장환(兪章煥) 1798 ∼ 1872
유신환(兪莘煥) 1801 ~ 1859
유성환(兪晟煥) 1804 ~ 1888
유교환(兪敎煥) 1805 ~ 1857
유초환(兪初煥) 1819 ~ 1893
유기환(兪箕煥) 1858 ~ 1913
유창환(兪昌煥) 1870 ~ 1935
유치숭(兪致崇) 1804 ∼ 1878
유치선(兪致善) 1813 ∼ 1874
유치봉(兪致鳳) 1826 ∼ 1906
유치형(兪致衡) 1877 ∼ 1933
유진오(兪鎭五) 1808 ~ 1873
유진필(兪鎭弼) 1860 ∼ 1925
유진태(兪鎭泰) 1872 ~ 1942
유진오(兪鎭午) 1906 ~ 1987
유길준(兪吉濬) 1856 ~ 1914
유성준(兪星濬) 1860 ∼ 1934
유일준(兪日濬) 1895 ~ 1932
유해준(兪海濬) 1917 ∼ 1986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
유민식(兪民植) 1898 ~ 1942
유상근(兪尙根) 1922 ∼ 1992


※ 배열 순서 : 항렬순이며, 동항렬(同行列)시 연배순 위의 명(命)자(字), 하(夏)자(字) 는 동항렬(同行列)임.

【유여해 (兪汝諧)】

생몰(生沒)은 미상(未詳)이며, 공(公)은 고려사(高麗史)에 기계유씨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고려 고종때 『최항(崔沆, 무신정권)이 하동감무 노성(盧成)을 죽이다. 노성이 급제한 유여해(兪汝諧) 등과 더불어 시를 지어 최항(崔沆)을 비방하였다하였는데 마침내 노성(盧成)을 죽이고 유여해(兪汝諧) 등을 해도로 유배시켰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제분은 5형제를 두셨는데 장남 형무(逈務)는 관(官)이 사재주부 동정이요, 3자 득선(得瑄)은 관(官)이 상승국부내승 추봉좌복야이며, 5자 득주(得珠)는 주부(主簿)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효통 (兪孝通)】

생몰은 미상이며, 자는 행원(行源)·백원(百源)이며 생원을 거쳐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31년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한약방문으로 된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세종실록


【유응부 (兪應孚)】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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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휘응부)묘소.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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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단.jpg)
위치 : 서울 동작구 노량진구
위치 : 경기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생몰은 ?~세조2(1456)이며,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이며 호는 벽량(碧梁). 경기 포천출생,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첨지중추원사·평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중추원동지사로 정2품(正二品)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재상으로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였고 숙종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시조 3수가 전해진다.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추강집, 연려실기술



【유진(兪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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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휘응부)묘소.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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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단.jpg)
위치 : 전남 고흥군 과역면 호덕리

생몰미상, 1462년(세조8년)에 가을 문과급제, 잡급직 주부(종6품), 1465년(세조11년)에 10월 병조 좌랑(정6품), 1467년(세조13년) 3월 형조 정랑(정5품), 1469년(예종원년) 3월 사헌부 장령(정4품), 1470년(성종원년) 1월 성균관 사예(정4품), 1475년(성종6년) 성균관 사성(종3품), 1477년(성종8년) 12월 예문관 부제학(정3품) 통정대부(당상관), 1478년(성종9년) 4월 홍문관 부제학(정3품) 통정대부(당상관), 1478년(성종9년) 6월 면직, 1481년(성종12년) 7월 성균관 동지사(종2품) 가선대부(당상관)에 서용하였으나 관직에 복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제학공은 옳다고 생각하시면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특히 주역(역리)에 능통하셨습니다. 부제학공의 자제는 네 분이십니다. 휘 구경 공의 묘소는 천안 직산 이북면 수천리에 소재하며, 사헌부 장령공(휘 수경)은 전남 고흥군 대강면 대산리에 소재합니다. 총관공(휘 위지)은 전남 화순군 화순면 서태리에 소재하며, 휘 지문 공은 묘소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부제학공은 임사홍, 임원준 일파의 만행 논죄하시다 파직되었으며 성종대왕께서 다시 서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시지 않으셨으며 만년에 고향 경기 안성을 떠나 전남 고흥에 안주하신 것이 대략 서기 1480년대 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부제학공 후손들은 고흥, 완도, 보성, 여수, 광양, 광주광산, 나주, 화순 등에 산거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 부제학 (副提學) : 조선시대 예문관,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영오연계보(부제학공파보),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용재총화



【유기창(兪起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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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묘소,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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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신도비.jpg)
위치 :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생몰은 세종19(1437)~중종9(1514)이며, 공(公)은 무과급제 출신이며, 관(官)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시며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 청절사(淸節祠)에 모셔져 있다.
묘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에 계시며 재실(齋室)은 동재궁(東齋宮)이다.

공은 세종19년 정사(서기1437년) 홍성 노은동 내포 외가(박첨)에서 유복자로 출생하여 성삼문가와 외가에서 살았는데 서기 1356년 세조2년 단종복위 사건연루로 성삼문가와 박첨가가 모두 돌육을 당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0세였는데 할 수 없이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비인의 처가 능성구씨댁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공은 정직함으로써 연산조 난정에 간쟁하는데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사적에 대하여 역사서 연산실기술에는 유기창(起昌)공은 기계인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구읍(九邑)의 수령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을 때 연산의 난폭한 정치를 간하다 영의정 성준의 잔당으로 몰려(연산10년 갑자사화) 거제에 유배되었다. 그때 같이 유배된 이가 세 사람이었는데 매양 서로 의지하여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연산의 명을 받아 김오랑이 급히 달려와 그중 한사람을 죽였다. 얼마 후 다시와서 또 한사람을 죽였다. 이제 남은 이는 공뿐이다. 공은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는 바다를 건너 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인들을 불러 작별을 하려하는데 그 사람은 중종대왕이 연산군(연산12년 9월)을 몰아내고 반정을 했다는 기별을 전해왔다. 또 새 임금 중종은 기창(起昌)공에 병조참지의 벼슬을 제수하고 아들 여림(汝霖)에게 한림의 벼슬을 내렸다 했다.
공은 서신을 보고 옛 임금 연산군을 위해 통곡했다. 또 아들 여림(汝霖)에겐 답서를 보내어 너는 새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라 했다. 공은 비록 연산군에 의해 귀양살이를 했을망정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의리를 지켜 홍언충, 김숭조, 남세주 등과 더불어 연산조 4절신의 한분이 되었다.
그후 공은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서호산인이라 자호하고 무의의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중종9년 갑술 10월4일에 졸하니 향년 78세라 유명으로 신주에 옛직함 첨지중추부사만 쓰라고 했다. 졸 후 나라에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예문관제학을 추증하고 숙종46년 경자년에는 강호의 사림들이 공의 청덕을 사모하여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통박동에 청절비를 세우고 아들 여림(汝霖)과 함께 향배 춘추제향을 올리니 공의 청절이 천추만대에 빛나도다. 공의 묘도 비인 판교에 뫼시었다.

아버지 휘 해 공은 진사로 24세에 조졸하였는데 이 어른이 바로 성승과 동서간이다. 그러므로 휘 기창(起昌)공은 사육신 성삼문과 이종사촌이 된다. 공은 아버지 해공과 어머니 죽산박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입신하여 집안의 중흥을 이루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연산군일기, 국조인물고



【유호인(兪好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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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인흉상(함양상림).jpg
경남 함양

생몰은 세종27(1445)∼성종25(1494),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선생은 경남 함양 병곡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뇌계, 자는 극기이며 유음(兪蔭)의 자(子)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에 합격한 뒤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하였고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봉상시 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한 후 1480년에 거창현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陜川)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시(詩) ·문(文) ·서(書)에 특히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뇌계집(?谿集) 7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여림(兪汝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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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공(휘여림)묘소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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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공신도비.jpg)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리

생몰은 성종7(1476)~중종33(1538), 호(號) 정당(政堂)이며, 1498년(연산 4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504년(연산10년) 식년문과(式年文科)병과 장원 급제했음.

예조판서 경안공(景安公) 유여림(汝霖)은 우리 기계유씨가 조선조에 들어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신 명향이고 학문과 절의 도덕과 큰 국량으로 우리 집안을 크게 빛냈다.
공은 성종7년 병신 1474년에 생하였는데 자는 계옥(啓沃)이요 , 호(號)는 정당(政堂)이며 기계인(杞溪人)이다. 고(考)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諱) 기창(起昌公)이요 비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성장하며 품성이 영민(英敏)하고 학문에 힘써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부인(貞夫人)은 창녕성씨인데 교리 휘(諱) 희의 손녀다. 휘(諱) 성희공은 성삼문공의 당숙으로 단종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성삼문공이 휘 기창(起昌)공의 이종사촌임을 감안할 때 창녕성씨와 혼사는 대대로 연줄관계에 있었다. 더욱이 휘 기창(起昌)공이 말년에 거제로 유배되어 간 것도 영의정 성준공 사건에 연계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 집안은 공사간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휘 기창(起昌)공이 거제에 유배된 것은 연산10년 갑자사화 때 인데 29세의 경안공(景安公)은 아버지 기창(起昌)공을 모시고 거제까지 갔었다. 이해 12월 공은 문과 급제하여 바로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고 이듬해에는 검열, 주서, 대교가 되었다. 연산조 12년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실각했다. 새 임금 중종은 즉시 휘 기창(起昌)공의 유배를 풀고 병조참의의 벼슬을 내리니 경안공(景安公)이 서신으로 이 소식을 급히 거제에 알려 드렸다. 그러나 휘 기창(起昌)공은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치셨고 다만 아들 경안공(景安公)에게 이르기를 너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훈교 했다.
경안공(景安公)은 벼슬길에 나서 성균전적, 전직강, 사간원종사관, 의정부사인 단양 한산군수 등을 거쳐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시강원보덕, 홍문관직제학.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중종14년 을묘 공44세때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정암 조광조선생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직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명현들이 희생되거나 귀양가고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기준, 정완, 한충) 경안공(景安公)은 파직되어 비인으로 침거했다.
이듬해 중종대왕이 크게 후회하여 경안공(景安公)을 선위사로 삼았다가 동부승지 병조참의에 승진시켰다. 중종18년 전라감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거쳐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공 55세 조정의 육경을 거느리고 권신 김안로 오국의 죄를 논박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비인에 유폐되었다.
마침내 7년의 유폐생활 끝에 중종32년(서기 1537년)에 다시 등용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정치보복을 반대하여 더욱 덕망을 얻었다. 당시 조정의 공론이 장차 정승으로 특배되리라 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공은 63세를 일기로 중종33년 무술 1538년 10월2일에 하세하시니 임금이 놀라워하시고 3일간 정사를 폐하였다. 또한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으며 중종은 경안공(景安公)의 시호와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대제학을 추증하였으며 고양 관산리에 장사지냈다.
※ 신도비는 선조19년(1586년) 공의 손 좌의정(휘 홍)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건립되었으며 신도비각의 건립은 대종회가 고양군의 일부 예산을 지원받아 준공되었다. 영의정 홍언필은 공의 신도비명에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사람됨이 장중하여 집에서는 효제의 도리를 다하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공경의 의무를 다하였으며 사려는 치밀하고 처단은 정확하여 좋은 자리의 내직과 참판 판서 등을 두루 거쳤으나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고 찬하였다. 공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았으며, 모재(慕齋) 김안국과 우의가 두터웠으며 하서 김인후는 공을 따르던 후배중의 한분이다. 저서에는 정당유고 2권이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이름을 빛낸 기계인은 거의가 공의 후손인 까닭에 기계 유씨의 중흥조라 일컫는다.(자손중 3정승 12판서 백인이 문과급제하였다.) 공의 저서 정당유고는 소문(疏文)이 주문을 이루며 부록으로 숙민공[(肅敏公, 휘 강(絳)]의 유고도 있으며 구한말 송병선 권응선 신응선 등이 서문을 쓰고 후손 필환, 치원, 치형(致衡), 치옥 등이 발문을 썼다. 근자(近者)에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중종실록, 국조인물고, 정당유고



【유여주(兪汝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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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공휘여주공묘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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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벽당시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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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공은행나무.jpg)
처사공과 임벽당김씨묘소
여류시인 임벽당김씨 시비
처사공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위치 :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생 1476 ~몰 1538, 자(字)는 사성(帥聖)이며, 호(號)는 임벽당(林碧堂)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안공[휘 여림(汝霖)]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추천 받았으나, 급제 못하고,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로 일생을 마쳤다. 특히 명필이었다.
부인은 임벽당(林碧堂)김씨로 조선 3대 여류시인(신사임당, 허난설헌)으로 유명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임벽당집



【유백온(兪伯溫)】

생몰은 1492(성종 23)∼?이며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중옥(仲玉), 호는 정산(鼎山). 진주출신이다.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 응시를 단념한 채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후학양성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이복형제 둘이 있었는데 그를 해치기 위하여 좁은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를 본 그는 말에서 내려 그들을 간절하게 타이르자 이에 감동된 그들도 차마 해치지 못하고, 그때부터 형제간 우애가 더욱 두텁게 되었다.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정온(鄭溫) 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함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진주성싸움에서 진몰(陣歿)하여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연려실기술, 영남인물고, 증보문헌비고


【유 강(兪 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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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민공 묘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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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민공신도비(차산리).jpg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생 1510 ~ 몰 1570, 중종36(154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급제하고 중종5년 경오11월 경진일생으로 신묘진사 신축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인조, 명종, 선조 4대에 걸쳐 승지, 오도관찰사 공조,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셨으며 경오 4월초 10일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졸하셨으며 숙민공(肅敏公) 시호를 받으시고 함경도 문회서원에 향배되었다.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관로가 순타하지 못하였다.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을 탄핵하다 여러 지방의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는데 윤원형이 죽은 뒤 한성 판윤 공,형,호조판서를 지냈으며 "30년 입조에 한번도 권세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다"라는 말로 자손들에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교훈은 남겼다.
또한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關西)의 유생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3년(서기1570년 경오) 공 졸 후 영의정 권철(權轍) 영의정 홍섬(洪暹) 영의정 박순(朴淳) 대제학 박충원(朴忠元) 이조판서 이기 등 공의 생전 막역했던 동료 후배들의 간곡한 주청과 주선으로 양주 차산리 경기내의 명산 차유령하에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에서 내려준 터)에 공의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선조17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월사 이정구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현손(휘 황)이 썼으며 수북 김광현이 전(篆)했다.
경기도 관찰사 재임 중에는 실전했던 고려말 3대 선산을 평택, 안성 등지에서 확인하여 봉축하셨다. 전종중의 성금으로 1987년 정묘 11월에 재실 양효재가 준공되어 장엄한 재실로 공의 유택을 수호하게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명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유 홍(兪 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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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공 묘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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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사전경3.jpg
위치 : 경기 하남시 산곡리

생몰(1524~1594),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판서 유여림(汝霖)의 손자로, 1549년(명종 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주서(注書), 전적(典籍),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63년 명종대 후반에 정국을 주도하던 권신(權臣) 이량(李樑)을 탄핵하였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도제조로 발탁되었다. 이후에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쳤으며,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명나라의 오해를 풀리게 하고 돌아왔다.

1589년 의금부판사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에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 왕비를 호종하여 해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10여조의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가 그의 시를 보고 직접 화운(和韻)하기도 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가장(家藏)한 책이 만여 권에 이르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계곡 장유(張維) , 전서(篆書)는 족손(族孫) 유한지(兪漢芝)가 썼다. 묘표(墓表)는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친필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명종실록,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국조인물지, 국조방목, 송당집



【유 영(兪 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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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공의 묘소와 숙민공 묘소(원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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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공 묘표(충간공의 글씨).jpg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생몰(1525~1585), 자는 덕제(德濟)이며 명종(1546-1567)때에 문과에 급제하시었는데 방을 부치던 그날 임금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 영(泳)의 집안은 삼세(三世)가 도덕군자이고 오세(五世)가 충효에다 어진 신하가 있었으며 육세가 과거에 급제한것은 매우 드문일이로다 옛날에 한(漢)나라 공신 장랑(張郎)이 오세에 긍하여 재상으로 봉사하였다고 하는데 유씨 집안에 장랑이나 다름없구나" 특히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내리시며 또 물으시기를 "책은 무슨 책을 읽었는고" 하시니 대답하시기를 "본시 집안이 가난하고 늙으신 가친이 계시어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습니다" 고 아뢰었더니 명종께서 서경(書經) 한부를 내주시며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도록 하여라" 고 하시였다 공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경연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의 벼슬이 증직 되었으며 또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 홍문관 부제학, 성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하셨다 숙민공(肅敏公)의 큰 아드님으로 61세에 하세 하시였고 묘소는 숙민공(肅敏公) 친산 서록에 합폄(合?)되여 있으며 증손 관찰사(휘 황)공이 표석을 세우고 5세손 영의정 유척기(拓基) 공께서 묘지명을 쓰셨다.
(양효경통[(11호) 자산공파 화수회 발행] 에서 발췌한 것으로 만취 진국의 회고록에서 지금까지 소개 되지 않은 내용임)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수(兪大脩)】

생몰은 1546(명종 1)∼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영(思永). 진사 함(涵)의 아들이며, 대경(大儆)의 형이다. 이 황(李 滉),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주서가 되고 성균관 전적에 이어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등 10년간 외직을 지낸 뒤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그 뒤 충주목사, 사옹원정(司饔院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내섬시정(內贍寺正)을 겸직하였다. 1584년 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유대기(兪大祺)】

생 1547 ∼ 몰 1615이며 자(字)는 경수(景綏)이며 호(號)는 침연조수( ?淵釣? ) - “깊은 연못에서 낚시하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시호(諡號)는 양간(良簡)이다.
명종 정미생(明宗 丁未生 - 1547년)으로 임진왜란시 선조대왕을 용만(龍灣 - 신의주 옛이름))으로 호종(扈從)한 공훈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에 제수 받으니 종2품 재상에 이르렀으며, 향년(享年) 69세 졸하였다.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되고 함원군(咸原君)에 봉(封)하였으며, <양간(良簡)>의 시호를 받음 ★ 호성원종 1등공신 , 위성원종 1등공신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의(兪大儀)】

생몰은 1549(명종 4)∼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자산군수 영(泳)의 자(子)이다. 어머니는 정 안(鄭 顔)의 딸이다. 공은 강원도관찰사 성증(省曾)의 아버지이다.
1598년(선조 28)에 병조정랑에 제수된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이후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었고 사후에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정(兪大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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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대정(참판공)제실.jpg
경기 덕양구 일산

생몰은 1552(명종 7)∼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휴(景休). 단성공[휘 호(灝)]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를 거쳐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과 대교를 거치고, 1589년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북평사(北評事)에 좌천되어 가던 도중 파직당하였다. 1591년에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1609년(광해군 1) 충청도관찰사로 승진하였으며, 1612년 동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61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전횡이 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5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비변사당상·병조참판 등에 등용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선조실록,광해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대진(兪大進)】

1554(명종 9)∼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신보(新甫), 호는 신포(新浦). 좌의정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충목공[휘 홍(泓)]의 자(子)이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84년에 이이(李珥)의 천거로 홍문관 직임에 발탁되어 정자·저작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전적·감찰, 공조·형조·호조·병조의 낭관을 지냈다.
1589년 부수찬·헌납, 1590년 이조좌랑·정랑·교리·장령·내섬시정, 1591년 정언·이조참의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고, 1593년 공조참의·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선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연려실기술


【유대칭 (兪大稱) 】

생 1565 ~ 몰 1634, 호(號)는 관원(灌園), 생원(生員), 관은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이르었다. 갑술년(1634년, 享年 70세)에 졸하였다. 청난훈(淸難勳) - 청난원종공신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관원유고(灌園遺稿) 1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관원유고 1권, 경모첩, 부여지



【유대일(兪大逸)】

1572(선조 5)∼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휴(德休), 호는 용은거사(隱居士). 좌의정 충목공[휘 홍(泓)]의 자(子)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600년(선조 33)에 음보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 뒤 귀후서별제·예산현감·면천군수·삼척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동지중추부사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기창군 (杞昌君)에 봉(封)에 졌으며, 우참찬(右參贊)에 증직(贈職)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인물고



【유호증(兪好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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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사(휘 호증)공 묘지석.jpg
함경도사 휘 호증공의 묘지석

생몰은 1533 (선조6년 계유) ~ 1615(광해군7 을묘)이며, 자(字)는 면부(勉夫), 호는 송강(松岡). 1533년(선조6년 계유)에 탄생하셨다. 월정 윤근수(尹根壽)에게 배웠다. 포저 조익(趙翼) 월사 이정구(李廷龜)와 벗하다.
1604년(선조37 갑진)에 성균 진사로 발탁되고 1605년(선조38 을사)에 문과에 합격하여 수찬, 검상, 사인 등을 거쳐 통훈대부에 올랐다. 공께서 여러 지방의 도사를(경상도사,함경도사) 거쳐 경기도 도사로 계실적에 광해혼조를 만나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월정의 제자들인 장유(張維)와 김육(金堉)등으로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1615년(광해군7 을묘)에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리셨다.
이에 숙종시에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송강(松岡)의 학과 덕을 추모하여 추서를 계달하여 정현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제학에 증직되다. 정부인 전의 李씨의 아버지는 선교랑 인개이며, 외조도 진사 원주 변(邊)응경이시다. 아들 세분을 두셨으니 경(木敬)과 육(木郁), 절(木兌)이다. 묘도 경기도 양주 진건면 사능리 산9번지오류동 亥좌 巳향으로 합폄하였으니, 좌의정 송시열이 글을 짓고 관찰사 유황(兪榥)이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참판 유계(兪棨)의 묘갈문과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추기묘지(追記墓誌)가 따로 있다. 따라서 계부인 연안 李씨는 문과부사 성(晟)이 아버지이시니 1624년(인조2 갑자)에 돌아가셨다. 묘는 양주 진건면 사릉리 화유령(꽃네미) 子좌午향에 모셨으니 영의정 유척기의 묘비문이 있다.

2004년(甲申潤月) 봄 길일을 잡아 남양주 진건읍 사릉에 모셔져 있던 공의 분묘를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삼성당리(마석동)의 장자 모계당 경(木敬)의 묘소위에 길지를 찾아 모시고 2005년(乙酉)에는 재실을 마련하여 11월 15일에 첫 세향을 모신 바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방목



【유석증(兪昔曾)】

생몰은 1570(선조 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성(而省), 호는 독송(獨松). 아버지는 봉사(奉事)공[휘 대록(大錄)]이며, 어머니는 김수원(金秀源)의 딸이며, 처부는 이반(李泮)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정랑·예조정랑·지평·형조참의를 거쳐 나주목사·전라감사 등을 지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광해군일기,국조방목


【유진증(兪晉曾)】

생몰은 1573(선조 6)∼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진(而晉), 호는 목오(木塢). 대록(大祿)의 자(子)이며, 전라감사를 지낸 석증(昔曾)의 동생이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광해군이 대비(大妃)를 폐할 때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한 백관이 무려 780여명인데 그 명록 속에 정랑으로 참례하였다.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연려실기술,국조방목


【유성증(兪省曾)】

생몰(1576~1649), 자(字)는 자수(子修) 호(號)는 우곡(遇谷)이시며 광해2(1610년) 사마시(司馬試), 광해11년(1619년) 별시 문과 장원 급제하셨다. 병자 1월28일생 하셨으며 경술 진사 기미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셨으나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사직, 조도사(調度使) 이창정(李昌庭)의 막하로 들어갔다. 뒤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있을 때 영남유생(嶺南儒生)이 이이첨을 논척하는 상소를 하자 그 소문 (疏文)을 쓴 사람으로 지목되어 투옥 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지평(持平)으로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扈從), 척화(斥和)를 주장했고, 그 뒤 장령(掌令)·수찬(修撰)·사간(司諫)·교리(校理)·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는 강화(江華)에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강원도 관찰사·예조참의를 지내시고 기축 1월26일 졸하시니 나라에서는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도비는 효종5년 세웠는데 영의정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자(子) 황(榥)이 글을 썼으며 죽소 김광욱이 전(篆)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광해군일기,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수증(兪守曾)】

생몰은 1578(선조 11)∼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약(子約). 병조참판 대정(大禎)의 자(子)이다.
1605년(선조 38)에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가 시직(侍直)에 전임되고, 같은 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주서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의 막료(幕僚)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찍이 장인 유영경(柳永慶)이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세자로 삼으려 하였던 사실로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탄핵을 받자 관직에서 물러나 동교노원(東郊蘆原)에 은둔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며 10여년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함흥부통판을 거쳐, 형조·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 전적·사예를 거쳐 1635년 장령, 이듬해 필선에 이어 강계부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무증(兪懋曾)】

생몰은 1580(선조 13)∼1659(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성(汝省). 조부는 충목공(휘 홍)이며 아버지는 청풍군수 대술(大述)이며, 어머니는 별제(別提) 홍반(洪磻)의 딸이다. 1634년(인조 12)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있다가 동반(東班)으로 서용되었으며, 이듬해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였고, 이듬해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그 뒤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안협현감 등을 역임하고, 1646년에는 공신회맹(功臣會盟)에 참가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1658년(효종 9)에 기안군(杞安君)에 봉(封)해졌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국조인물고


【유선증(兪善曾)】

생몰(1583 ~ 1653), 관직 : 청도군수(淸道郡守), 자(字)는 계성(季省), 함원군(咸原君) 휘 대기(諱 大祺)의 자(子), 선조 계미년(1583년)에 출생하였다. 임자년( 1612년,광해 4년)에 진사가 되고, 관직은 청도군수(1645년 ~ 1647년)에 이르렀다. 인조 계해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훈작이 내려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병자호란(1636년, 인조14년)이후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술년(1658년) 4월 16일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배위는 신평송씨로서 부친이 첨추 李公(휘 기원)인데, 계사년(1653년) 2월9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충청도 청양군 운곡면 위라리 언덕에 경향(서향)으로 쌍분을 썼다. 장령 허후(許厚)가 찬술한 묘표는 8대손 치형(致亨)이 명(銘)을 추기하였고, 7세손 창환(昌煥)이 전자(篆字)를, 9세손 진호(鎭浩)가 글씨를 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백증(兪伯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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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평군(휘 백증).jpg

생몰(1587-1646), 자선(子先). 호 취헌(翠軒). 시호 충경(忠景).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였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 기평군(杞平君)에 봉(封)해졌다. 1624년(인조 2) 사간 때 김신국(金藎國) ·조성(趙誠) 등을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부응교 때 남이공(南以恭)이 불법을 자행한다고 논박하였다가 이천(伊川)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사도시정(司 寺正)이 되어 화의의 잘못을 소론하였다. 1629년 이조참의 때 안일한 대신들을 비난, 다시 수원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부제학 등을 지내고,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副摠管)으로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화의를 주장한 윤방(尹昉) ·김류 등의 처형을 상소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637년 화의 성립 뒤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어, 신주(神主)를 모독한 윤방을 탄핵하였다. 국가 자강책을 올린 뒤 사직 낙향하였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기평부원군(杞平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문집에 《취헌소차》 3권 3책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연려실기술,청선고(淸選考)



【유 경(兪 木敬)】

생몰은 1599년(선조32기해)~1646년(인조24 병술)이며 관(官)은 통덕랑이다. 자산공[휘 영(泳)]의 2자이신 선무랑공[휘 대의(大儀)]의 장자인 도사공[휘 호증(好曾)]의 3자중 장자로 자(字)는 무백이요, 호는 모계당(慕溪堂)이라 사계 김장생 선생이 호를 지으셨으니 慕는 옛 성인을 사모함이요, 溪는 물이 흐르는 근원이라 또는 잠암(潛庵)이라 한다. 뜻인즉 출세치 못했다는 의미. 1599년에 출생하시여 시남[휘 계(棨)]의 종형 유 재와 더불어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월정 윤근수(尹根壽)에게 예(禮)를 물었으니 그 학(學)과 덕망(德望)이 높았었다.
광해혼조를 지탄하시며 세상에 나가시지 않으니 사람들은 잠암(潛庵)이라 부르시다. 일직(逸職)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경연동지에 가했으며, 냉정동에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사계(沙溪)의 제자가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국태민안이 회복되어 정사가 안정될 무렵, 영상인 월사 이정구가 상(임금0에게 아뢰어 사계의 수제자인 경(木敬)을 기용토록 고달하니 상께서 좌승지의 직첩을 주어 부르시니 혼조를 마다한 臣이 어찌 성조를 받들 수 있으리오 이는 쓰면 내뱉고 달면 삼키는 속된 도리라 臣에게는 벼슬의 체질에 부당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시다.
임금은 이 말을 들으시고 참으로 어진 선비라 하고 업적을 내리시었다. 인조24년 1646년 9월 29일에 돌아가시니 숭정대부 좌찬성 겸 지경연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二師)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포천시 신북면 삼성당리 마석동(암) 산 65번지에 배 죽산朴씨와 계향에 合?으로 모셔져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 황(兪 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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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성증)공의 묘소(참배객이 있는곳)와 충간공(황)의 묘소.jpg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차산리

생몰(1599-1655), 자(字)는 전숙(典叔), 호(號)는 봉주(鳳洲),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인조 11년(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급제하였다.
선조32년(1599년) 기해 4월28일 서울 서소문 반송방에서 출생하셨으며 성장하면서 품성이 영민하고 총명절인하여 모두들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고 촉망 하였다. 17세 되던 해에 월사 이정구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며 월사선생이 애중하고 격려하였다. 인조2년 26세되던 해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태학에 들어갔다. 인조11년 35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6월에 부정자를 거쳐 성균관봉적(成均館 籍) 을해년 36세에는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14년 병자에는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시 정언이 되었는제 이때 청나라 심양에 갔던 나덕헌 등이 청의건국을 축하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이해12월 청나라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병자호란) 공은 아버님 관찰사공(省曾)을 모시고 강화로 들어갔다가 관찰사공은 갑곳파수대장이되고 공은 서호순검사가 되어 즉시 떠났다 급히 군대를 정비하고 사병을 모집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강화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의 인조대왕이 청군에 항복됨에 따라 2월에 서울로 돌 와 왔다. 이때 조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청군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척화신들을 처벌하자는 논란이었다. 주전론자 김상헌과 삼학사들은 청나라로 끌려갔고 정온은 칼로 배를 갈랐다. 이때 문중의 충경공 유백증(伯曾), 문충공 유계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수 백년 걸친 우호와 임진왜란 당시 대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와준 의리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가 친명반청의 정책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므로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의 압력이 강경하기 때문에 공은 마침내 단양에 유배되었다. 얼마 아니 되어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벼슬이나 세상에 일체 인연을 끊고 선유동에 우거하며 주자절요를 탐구하는데 전심하였다. 이때 마침 아버님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기 때문에 집을 강원도 안협현으로 옮겨 살면서 귀양 와 있는 회곡(晦谷) 조한영과 교유하였다. 인조17년 다시 등용되여 호조좌랑, 춘추관 서기관이 되고 이듬해 예조정랑에 승진되고 충청도사가 되었다. 얼마 안되여 벼슬을 떠나 청풍 로촌리로 들어 갔으며 이듬해 43세때엔 동양위 신익승과 함께 단양도담을 유람하고 이어 회덕으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을 찾아 학문과 세상사를 논했다. 겨울에 청풍로촌리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6월 교리에 임명되였는데 이후 기축년에 병조참지, 경연참찬관, 좌부승지,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2년에는 다시 춘추관수찬관이 되고 좌승지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서천군수로 나갔다 효종4년에 조정에 들어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계모상을 당했다. 이듬해 겨울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효종6년 을미(1655년) 4월16일 57세로 졸하였다. 공 졸 후 100년(영조32년) 충간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국원1등공신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성균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성이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학문이 넓고 깊었다. 또 항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평생 정도와 절의로써 처신하였으니 인조, 효종, 양조의 명신으로 추앙 받았으며 저서에 봉주집이 있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이 전(篆)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고



【유 철(兪 ?)】

사진 이미지
대사헌(철)공의 묘소와 2기의 시비.jpg

생몰(1606-1671), 자는 방숙(方叔), 호는 취옹(醉翁),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을 거쳐 사간에 재직 중 친청파(親淸派)로서 명나라를 피하고, 청나라에 사대의 예(禮)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된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 가족들에게 은휼(恩恤)을 베풀게 하였다.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으로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신(臣)이라 칭한 승지 유도삼(柳道三)의 파직을 주장하여, 효종의 노여움을 사 진도(珍島)에 위리안치 되었다. 여러 대신들의 무마로 1개월 만에 방환, 현종 초에 복관되어 대사헌을 지냈다. 문집에 《취옹집》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승정원일기,연려실기실,국조방목,국조인물고,청선고(淸選考)



【유계 (兪棨)】

생몰(1607~1664),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 설서(說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林川)에 유배되었고 1639년 풀려났으나 벼슬을 포기, 금산(錦山)에서 학문을 닦았다. 1644년 주서(注書)로 기용되어 1646년 무안현감을 지냈고 1649년 부교리 때 인조가 죽자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 예론(禮論)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이어서 인조의 묘호 문제로 다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58년 송시열(宋時烈) 등의 천거로 문학(文學)에 등용되었다.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논박 제거했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신병으로 사직했다. 성리학에 밝고 예론과 사학(史學)에 정통하였다. 1714년(숙종 40) 간행된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사후(死後)에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편자(編者)의 주장은 전혀 없이 윤선거(尹宣擧)와 같이 편찬했다고 하는데,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유계(兪棨) 혼자서 편술한 것이라고 하여 노·소론의 분쟁까지 있었다.
임천 칠산서원(七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가례원류(家禮源流)], [시남집(市南集)], [여사제강(麗史提綱)], [강거문답(江居問答)]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시남집,국조인물고,전고문헌(典攷文獻)



【유 헌(兪 櫶)】

생몰은 1617(광해군 9)∼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백(晦伯)이고, 호는 송정(松汀)이다. 군수 희증(希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성 구씨로 성남(成男)의 딸이다. 1665년(현종 6)에 호조좌랑으로 재직 중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66년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어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익년 정월 대신 허적(許積)을 과격하게 비판한 죄로 부령에 유배되었다. 1670년 지평으로 복직하여 공주들의 저택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것을 간쟁하였다. 이어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강계부사로 나갔다가 12월에 승지로 승진하여 돌아왔다. 1680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다시 승지로 복직하였다. 1682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군사의 정원을 축소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후에 도승지와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숙종실록,국조방목,호보(號譜)


【유명윤(兪命胤)】

생몰은 1629(인조 7)∼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윤보(胤甫). 시남[휘 계(棨)]의 자(子)이다. 아버지로부터 수학한 뒤 1644년(인조 22)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유학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9년 설서가 되었으며, 승정원주서·수찬·홍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검열이 되었으나 부자상피법(父子相避法)에 의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다시 사직(史職)에 임명되었으며, 병조좌랑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대교에 임명되었으며, 호남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와서 왕에게 농사일과 백성들의 생활상에 대한 수 천언을 아뢰어 이들의 역(役)을 줄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듬해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안으로 양생(養生)하는 예를 행하고 경애를 갖추었으며, 만년에 더욱 성리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을 애독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효종실록,현종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하익(兪夏益)】

생몰은 1631(인조 9)∼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겸(士謙), 호는 백인당(百忍堂). 필선 수증(守曾)의 손자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사서·정언·부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황해도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수령들에게 신상필벌하여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그뒤 이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숙청될 때 함께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되자 풀려나와 도승지에 등용, 그뒤 이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사고(史庫)의 보존에 대하여 소를 올려 사고의 보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1690년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사헌·좌참찬·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 같이 삭출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현종실록,숙종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지,번암집(樊巖集)


【유하겸(兪夏謙)】

사진 이미지
휘하겸(경주부윤)묘소.jpg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생몰(1632∼1691), 공은 아버지 극(極)공(통덕랑 증 호조참판)과 어머니 풍산홍씨(父郡守洪霆공의 녀)의 차남으로 1632년(인조10년)에 출생하여 3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죽산박씨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훈육으로 성정이 온순 침착하였고 숙부인 비(?)공(청도군수증이조판서)을 스승으로 향학열이 남달리 높아 학식이 날로 높아지고 인격이 원만하며 언행이 신중 근엄하였다. 공은 1672년 시월(현종13년) 41세에 문과급제하여 다음해에 승문원부정자로 임명되었고 43세에 도찰방과 45세에 승정원주서 춘추관사를 거쳐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지평이 되었다. 1676년(숙종2년)에는 동지사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하여 성균관 직강이 되고 1678년에는 사헌부장령 간성군수 1679년 성균관 사마시 시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80년에는 목민관으로 영남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경신정변으로 잠시 은거하다가 진주목사와 선산부사를 거쳐 1683년에 증광사마시시관과 종성부사를 역임한 후 1689년 예조참의 재직시 기사환국의 정변 후에 동부승지로 임명되고 곧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같은 해 가을에 가선대부 직위인 경주부윤으로 영진하여 선정으로 목민활동에 전념하던 중 관내 기계현 현지 고로들의 증언과 고증으로 기계유씨 문중의 오랜 현안인 시조묘소 추심사업을 완결하여 1689년9월에 시조묘소를 사초하고 다음해 1690년5월에 4촌형 예조판서 하익공의 친필로 신라아찬유공지묘(新羅阿飡兪公之墓)라는 표석을 세웠다. 공은 1691년3월에 좌부승지로 재임명되었다가 8월에 청송부사로 전임 2개월 후인 10월 27일 향년 60세로 임지에서 별세하여 고양시덕이동증조 참판공 묘소 가까운 곳에 뫼셨으며 배(配) 정부인창녕성씨[(부호군성찬,父 護軍成)공의 여]는 천수를 다하여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슬하에는 장녀와 장자 함창현감 도중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 의중(義重)이며 손자는 통덕랑 언규(彦揆), 언진(彦振), 언정(彦廷), 진사 언석(彦錫), 증손자는 한덕(漢德), 한담, 한망(漢望), 한노(漢老)이고 현손은 주주(?柱) 외에 많으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단성공의 5세손으로 문과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감에 있어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여러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특히 우리 기계유씨 문중의 오랜 숙원인 시조묘소 찾기 사업을 완결한 공적은 종사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신도비문중에서>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명일(兪命一)】

생몰은 1639∼1690(인조17∼숙종16)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만초(萬初).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비(?)의 자(子)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여 1669년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고, 이어 전옥서(典獄署)와 장흥고(長興庫)의 봉사를 거쳐 사도시직장(司도寺直長)·공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거쳐 지평으로 재직중 남인 박태유(朴泰維)를 탄핵하고, 이어 남인인 장령 홍수주(洪需疇)를 논핵하여 파면하게 하였다. 1685년 장령으로 경기도암행어사가 되고, 이듬해 사간에 전직, 168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명뢰(兪命賚)】

생몰(1652~1712)이며 호(號)는 자교당(慈敎堂)이며, 충간공[휘 황(榥)]이 50세에 가깝도록 유씨 부인에게서 후사가 없이 하세함으로 당질 명기(命夔)를 계자(系子)로 삼았다. 삼종제 시남 공이 속현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처음에는 [무슨 속현이냐] 웃어 넘겼으나 수삼차 권고에 못 이겨 시남공의 주선으로 우암(尤庵) 선생의 재종 시욱의 딸을 재취 부인으로 삼았다. 이 송부인에게서 효종(孝宗)3년 임진(壬辰, 1652년) 6월14일 午時에 생하시었다. 자는 필경(弼卿)이며 우암 선생께서 자교당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충간공(忠簡公)이 효종(孝宗)6년 을미(乙未)에 57세로 졸(卒)하니 이때 공(公)의 나이 겨우 4세이다. 충간공(忠簡公)은 임종(臨終)에 부인송씨(夫人宋氏)와 아우 대사헌공(大司憲公)에게 어린 아들의 훈육(訓育)을 유언(遺言)으로 남겼다.
公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세가 단정하였지만 어머니 송씨(宋氏)부인은 항상[과부의 아들]이라는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또 품성이 높은 송씨부인은 사서(史書)에도 통달하여 어린 公에게 소학통감(小學通鑑) 등을 가르쳤다. 이런 연유로 해서 우암선생(尤庵先生)이 후일 公에게 자교당(慈敎堂)이라는 별호(別號)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20세때 당숙(堂叔) 도승지공(都承旨公)이 교관(敎官)이 되었는데 이에 취학(就學)하여 여러 아이들과 어울렸다. 무신(戊申)년 17세때 반남박씨와 결혼하고 우암(尤庵) , 동춘(同春) 양(兩)선생을 찾아 뵈었는데 우암 선생(尤庵先生)은 어머니의 친정집 어른이요 동춘(同春)선생은 아버지의 막역한 친구라 양(兩)선생은 모두 공이 늠름하게 성장한 것을 기특하게 여겨 애중(愛重)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公은 숙부(叔父)의 엄한 훈교(訓敎)로 과거공부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나 20세 때 숙부(叔父) 대사헌공(大司憲公)의 상(喪)을 당하고 이어 갑인(甲寅)으로부터 나라의 정사(政事)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일체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7년간 단양(丹陽) 산골로 들어가 살았다. 이 사이 백형(伯兄)의 경산임지(慶山任地)로 갔다가 우암선생의 유배지를 찾아 선생의 가르침으로 성리학(性理學)의 제서(諸書)를 섭렵하였다. 다시 양주(楊州) 선영하(先塋下)에 돌아와서 후학들을 가르치니 내학자(來學者)가 심히 많았다.
숙종36년 경인에 민진후공(閔鎭厚公)이 公이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천거하여 제배(除拜)되었으나 [다 늙은게 무슨 벼슬이냐]하고 취임하지 아니하였으며 60평생 벼슬이라곤 미관말직도 아니하였다. 20년간 우암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고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岩) 정호(鄭澔), 삼연(三淵) 김창흡,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지촌(芝村) 이희조( 李喜朝),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등 당대 명류(名流)들과 추허(推許)를 받으며 선우(善友)하였다.
여러 번 정변(政變)을 치르면서 스승의 비명을 겪었고 사우들의 곤욕도 보면서 항상 학문에 정진하며 자세가 의연하니 사림의 존경을 받았고 학문상의 문제나 조정의 일까지도 어떤 물의가 있을 때는 公의 장자다운 의견이 가장 존중되었다.
우암 선생은 생전에 공의 애지중지하였고 주자학에 바탕을 둔 선생의 학문을 이어 받았으나 그 중에도 예학에 가장 조예가 깊어 저서에 疑禮問答(의례문답)3권 등이 있다. 숙종38년(임진) 4월4일 향년 61세로 하세하시니 나라에서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웅(兪命雄) 】

생몰은 1653(효종 4)∼1721(경종 1). 자는 중영(仲英),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석(晳)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682년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에 사헌부 정언 · 지평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른 서인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자 사헌부 장령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696년 금성 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 일로 암행어사 여필용(呂必容)에 의해 천거되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707년 황해도 관찰사, 1718년 형조 판서, 1720년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경종 1년(1721)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해서를 잘 썼다. 시호는 온간(溫簡)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국조방목,겸산집(兼山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유명홍(兪命弘)】

생몰은 1655(효종 6)∼1729(영조 5). 자는 계의(季毅), 호는 죽리(竹里), 석(晳)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숙종 8년(168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8년 지평이 되었으나 이듬해 기사환국 때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자 등용되어 장령을 역임하였다. 1702년 궁가(宮家)에서 행해온 절수(折受)의 폐해를 상소하여 백성을 심히 괴롭히는 것을 모두 재감(裁減)시키자고 진언하였다. 경종 1년(1721) 한성부 좌윤·전라 감사가 되었으나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1725년 재 등용되어 대사간이 되고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영조 2년(1726) 한성부 판윤, 1727년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헌(章憲)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


【유명건(兪命建)】

이미지 사진
(나주목사공휘명건신도비.jpg)
위치 :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삼은리

생몰(1664 ~ 1724), 자(字) : 중강(仲强)이며 대사헌(大司憲) 휘 철(諱 ?)의 자(子)이며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사위이다. 생원(生員)을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음.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경기 안성에 있다. 기계유씨 가문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집 (兪命集)】

생몰은 1665~1733이며 자(字)는 여성 (汝成), 호(號)는 서주 (西州)이다.
선(善)을 좋아하고 도(道)를 즐겼다. 무신란(1728년)에 문덕린(文德麟)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분전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악(兪命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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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사공묘소전경.jpg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생몰(1667-171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군사(君四). 대사간 철(?)의 자(子)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김창흡(金昌翕)에게서 배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94년 갑술옥사로 송시열이 신원(伸寃)되자 벼슬에 뜻을 두고 17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의금부도사가 되고 지방의 수령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도곡집(陶谷集)



【유상기(兪相基)】

생몰은 1651(효종 2)∼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공좌(公佐), 호는 기초재(祈招齋). 이조참판 계(棨)의 손자이며, 이조정랑 명윤(明胤)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01년(숙종 27)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 출사하여 벼슬이 용담현령에 이르렀다.
조부(祖父)이신 시남공[휘 계(棨)]의 저서인 《가계원류 家禮源流》를 간행할 때에, 스승 송시열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하였다고 윤증(尹拯)을 공격한 정호(鄭澔)의 발문으로 소론의 공격을 받고 나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윤집(尹集)의 문집을 불사르고 노론이 득세하면서 풀려나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송추(松楸)에 돌아와 조부(祖父)의 이력을 적은 [시남연보(市南年譜)]와 [계사왕복서(癸巳往復書)] 등을 지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시남연보,계사왕복서(癸巳往復書), 장암집(丈巖集, 정호鄭澔)


【유광기(兪廣基)】

생몰(1674 ~1757), 자(字)는 인백(仁伯), 호(號)는 괴헌(槐軒)이다. 자교당(慈敎堂) 휘 명뢰(諱 命賚) 의 장자(長子)이다. 현종 갑인생(顯宗 甲寅生 - 1674년)이며 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 )를 역임하였다. 『괴헌유고(槐軒遺稿)』 2권을 남겼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차산리 선영에 안장되어 계신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우기(兪宇基)】

생몰은 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재(大哉), 호는 경도암(景陶庵). 명홍(命弘)의 아들이며, 명중(命重)에게 입양되었다.
판관으로서 1739년(영조 1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1741년에 헌납, 이듬해에 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수찬에 재직하고 있을 때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자, 하늘의 뜻을 헤아려 임금은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른 정치를 행하도록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43년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으로 사헌부장령에 제수되고, 동지사·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헌납·사간·응교·세자시강원필선·집의·보덕 등을 거쳐 1749년 승지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청선고(淸選考)


【유최기(兪最基)】

생몰(1689~1768), 자는 양보(良甫). 호는 자락헌(自樂軒)·무수옹(無愁翁)이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3년 뒤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정미환국 때 소론의 거두 이광좌(李光佐)의 횡포를 반박 상소하다가 삭직되었다. 1729년 다시 지평으로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거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 命)의 신원(伸寃)과 소론의 음모사실을 상소 논박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747년(영조 23) 병조참의가 되어 이광좌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주청하다가, 웅천(熊川)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1763년 영조가 70세 때 추은(推恩)의 뜻으로 정헌(正憲)에 특진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68년 의금부판사 ·우참찬에 이르렀다. 저서는 무수고(無愁稿) 15권을 남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호보(號譜), 풍고집(楓皐集)


【유척기 (兪拓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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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재문익공초상화2.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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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재공묘소전경.jpg)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해5리

생몰은 1691(숙종 17)~1767(영조 43)이며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 문익(文翼)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급제, 한원(翰苑) ·삼사(三司)를 거쳐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책봉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집권한 소론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홍원현(洪原縣)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르자 앞서 세자 책봉문제에 연좌되었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 命)을 복관시키고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재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만년에 이천보(李天輔)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다시 등용되었다가 사퇴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에 [지수재집(知守齋集)](15권)이 있다. 특히, 금석학에 뛰어났으며 기계유씨문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해5리 논골에 뫼셔져 계십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지,지수재집,은파유고(恩坡遺稿)



【유숙기(兪肅基)】

생몰(1696~1752), 자 자공(子恭)이며 호는 겸산(兼山). 단양 출생. 김창흡(金昌翕)에게 배웠다. 1715년(숙종 4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과는 통과하지 않았다. 송산(松山)에서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교하(交河)의 매음(梅陰)으로 옮겨 제자들을 가르쳤다. 1733년 명릉참봉으로 등용되어 효릉참봉 ·상의원직장 ·종부시주부 ·금구현감 ·임피현령 ·전주판관 등을 지냈다.
일생을 경학(經學)과 성리학에 힘썼으며, 수령으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치적으로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였고, 경종대에 소론에게 죽임을 당한 윤지술(尹志述)의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저술로 [태극도설차의(太極圖說箚疑)], [중용차의(中庸箚疑)], [서경차의(書經箚疑)]가 있다. 문집으로 《겸산집(兼山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겸산집,호보,


【유언명(兪彦明)】

생몰은 1666(현종 7)∼?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용회(用晦). 판관 정기(正基)의 자(子)이다. 1699년(숙종 25)에 통덕랑으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03년 지평으로 있을 때에 북성(北城) 쌓는 일을 중지하고 기민을 구하라는 상소를 올려 왕이 가납하는 등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박세당(朴世堂)의 훼경(毁經) 사실을 놓고 노론들이 논란을 벌일 적에 이를 옹호하여 소론의 소장으로 지목을 받았다.
1705년 소론 임보(林溥)와 남인 이잠(李潛)이 세자(世子:뒤의 景宗) 모해설이 있다고 노론 김춘택(金春澤)을 공격하였는데, 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그 뒤 그의 아버지가 후취(後娶)의 행실을 들어 이혼하여줄 것을 청하였는데, 처음에는 여러 대신들이 의논하여 이혼을 결정하였으나 음행의 사실이 없어 국전(國典)에 어긋난다 하여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뒤 계모는 관아에서 언명에게 죄를 전가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누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변명도 못하고 관계에서 물러났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재상 윤지완(尹趾完)도 칭송한 바 있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고


【유언철(兪彦哲)】

생몰은 1687(숙종 13)∼1744(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명(原明). 부윤 명일(命一)의 손자이며, 덕기(德基)의 자(子)이다. 1717년(숙종 43) 사마시에 합격하여 다음해 정릉참봉에 제수되었다. 형조좌랑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어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여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자, 경상감사 황 선(黃 璿)에게 보고하고 고령·지례 양 읍의 병사들을 이끌고 합천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관(官)은 부사에까지 올랐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송호집(松湖集)


【유언술(兪彦述)】

생몰은 1703(숙종 29)∼1773(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지(繼之), 호는 송호(松湖)·지족당(知足堂)·서고(西皐). 부사 명일(命一)의 손자이며, 진사 복기(復基)의 자(子)이다.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6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에 뽑혀 검열이 되었다.
1744년 6품직에 올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정랑을 거쳐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간으로 있을 때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이광좌(李光佐) 등을 성토하였고, 1749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772년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직간을 잘하여 영조에게 인정되었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족숙인 유척기(兪拓基)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송호집》 6권을 남겼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송호집(松湖集)


【유언지 (兪彦摯)】

생몰은 1706 ~ 1776이며 자(字)는 은경 (殷卿), 호(號)는 양호재(養浩齋)이다. 숙종 병술생( 肅宗 丙戌生 - 1706년)이며, 무과(武科)급제하였으며, 홍주목사(洪州牧使), 가의대부 동중추부사(嘉義大夫 同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모셔져 있으며 저서는 [양호재유고(養浩齋遺稿)] 2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양호재 유고 2권


【유언민 (兪彦民)】

생몰은 1709~1773이며 자는 이천(伊天), 호는 석은(石隱)·기재(棄齋)이다. 1732년(영조 8) 진사가 되어 도사(都事), 직장, 좌랑을 지냈다. 174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8년 장헌세자가 평양에 밀행할 때, 당직으로서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삭직되었다. 뒤에 복관되어 이조참의 ·대사성 ·예조참판을 거쳐, 1771년 도승지에서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석은집(石隱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


【유언집(兪彦鏶)】

생몰은 1714~1783이며, 자는 사호(士鎬)이며 호는 대재(大齋), 돈령부영사 언호(彦鎬)의 형(兄)이며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가 되었다. 1778년(정조 2)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1783년 돈령부도정(都正)으로 있으면서 원자(元子)를 보도(輔導)하였다. 편저서에 《오복명의(五服名義)》가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정조실록,호보


【유언현(兪彦鉉)】

생몰은 1716 ~ 1790년이며, 자(字)는 중필 (仲弼)이다. 숙종 병신생(肅宗 丙申生 - 1716년)으로 영중추(領中樞) [휘諱 척기(拓基)]의 자(子)이며 생원(生員)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언호(兪彦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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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문공영정(규장각).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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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문공묘소전경.jpg)
위치 : 경기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

생몰은 1730~1796이며, 자는 사경(士京), 호는 즉지헌(則止軒)이며 시호 충문(忠文)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檢閱) ·설서(說書) 등을 지냈다. 벽파로서, 시파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정치를 없애는 것이 청의와 명분을 살린다고 생각한 정치적 모임인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타파하고자 한 영조로부터 흑산도로 정배 명령을 받았다. 정조 즉위와 함께 시파로 태도를 바꾸어 정조의 총애를 받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로 발탁되었으며, 이조참판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 형조판서가 되었다.
1787년 우의정으로서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중추부판사로서, 조덕린(趙德 )사건으로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 풀려나오고, 1795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에 이르렀다.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즉지헌집(則止軒集)》, 저서에 《연행록(燕行錄)》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정조실록,순조실록,국조방목,명의록(明義錄), 은파산고(恩坡散稿)



【유한소(兪漢蕭)】

생몰은 1718 ~ 1769이며 자(字)는 여인(汝人), 호(號)는 아재(雅齋)이다, 자교당[(慈敎堂, 휘 명뢰(諱 命賚)] 의 사손(嗣孫)이며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다. 관(官)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비문(碑文)은 영종대왕 어제비문(英宗大王 御製碑文)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영조실록


【유한갈(兪漢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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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헌공영정.jpg

생몰은 1722 ~ 1795이며, 자(字)는 여수(汝水), 호(號)는 소요헌(逍遙軒)이다. 대사헌[(大司憲) 휘 한소(諱 漢蕭)]의 제(弟)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평양서윤(平壤庶尹),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한준 (兪漢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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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암공영정.jpg

생몰은 1732(영조8)~1811(순조11)이며, 자는 만청(曼淸) 또는 여성(汝成), 호는 저암(著庵) 또는 창애(蒼厓)이다. 처음 이름은 한경(漢炅)이었다.
당대의 문인·서예가로 이름 높던 유한지(兪漢芝)의 육촌형으로 문장뿐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학자이다. 1768년(영조 4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김포군수 등을 거쳐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남유용(南有容)의 제자로 송시열(宋時烈)을 추앙하여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 한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저암집》이 있다.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벗으로 둔 화가들은 많았던 듯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그가 쓴 제발문(題跋文)이 자주 눈에 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순조실록,저암집,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유한인(兪漢人)】

1741(영조 17)∼1806(순조 6)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여옥(汝玉), 호는 도암(陶庵)이다. 아버지는 진사 언익(彦益)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88년(정조 12) 정언이 되었다. 1804년(순조 4) 외직인 단성현감으로 나가 민막(民#막05)을 제거하고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그는 인품이 청간(淸簡), 엄정(嚴正)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운 일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또한, 여가에는 경의(經義)를 강론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청담(淸淡)한 시취(詩趣)로 시영(詩詠)을 즐기기도 하였다. 1806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죽었으며, 왕이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1810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모현사(慕賢祠)를 사액 받아 그곳에 제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도암실기(陶庵實紀)


【유한녕(兪漢寧)】

생몰은 1743 ~ 1795 이며, 자(字)는 자안(子安)이며, 영의정(領議政) 휘 척기(拓基)의 손(孫)으로 생원(生員)에서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관(官)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방목


【유한지(兪漢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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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지묘소.jpg
위치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생몰을 1760~1834이며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기원(綺園)이다.
영조 36년(1760년) 경진 8월1일 유시(酉時)에 생(生)하시어 산청현감, 영춘현감, 진천현감,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힌 유한준(兪漢寯)의 재종제로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전서와 예서에 능하였으며 필체가 아름다웠다. 서풍은 글자 모양이 매우 정돈되고 또한 규모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신위는 경수당집에서 청풍군수 윤제홍의 산수화와 영춘현감 유한지(漢芝)의 전서, 예서가 당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근역서휘 근묵 등에 전하는 공의 글씨를 보면 당시 빈번했던 중국과의 내왕에 따라 전래된 비첩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을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경포대 현판, 백운암현판(충주 엄정면 소재), 만안교비(경기도 안양시 소재, 만안교 정조 19년 경기지방문화재), 화홍문 편액(정조 18년 경기지방문화재), 은해사 영파대사비(경북 영천소재, 경북문화재), 문익점신도비의 전액(경북 산청, 경남문화재 자료 제53호), 이주국장군 신도비(경기도 용인시 소재, 용인향토유적 제4호), 해운정 전액(강원 삼척시), 병암진장첩[김홍도, 홍의도, 유한지(漢芝) 작 유물], 충목공(휘 홍, 좌의정) 신도비(경기 하남 소재)와 또한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의 글씨와 전각이 소장되어 있다. 공의 글씨와 전액은 현재에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갑오 8월1일 향년 75세로 하세하시었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뫼셔져 계십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유만주(兪晩柱)】

생몰은 (1755∼1788)이며, 공은 일기인 『흠영(欽英)』을 남겼는데 이 책은 1775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13년간 기록한 일기인데, 일기의 대부분이 독서와 사색의 편력으로 가득 차 있는 실로 방대한 독서일기를 남겼다. 이 책에서는 암송해야 할 책은 몇 번 읽었는지를 꼼꼼히 밝혔고, 거저(巨著)인 경우에는 날마다 얼마씩 읽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경화노론 지식인의 사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부친은 대문장가 유한준이며, 사위는 김도희(金道喜)이다. 김도희(金道喜)는 추사 김정희의 6촌 형으로 1843년(헌종 9) 좌의정, 뒤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흠영(欽英)


【유병주(兪秉柱)】

생몰은 1778(정조 2)∼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여(德汝). 금산군수 한기(漢紀)의 아들이다. 일찍이 김원행(金元行: 金昌協의 孫)에게 수학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었고, 1811년 숭릉참봉(崇陵參奉)에 배수되었으며, 그뒤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세자시강원설서·장악원주부·형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외직으로 나가 증산현령이 되었는데,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군향(軍餉)을 충족시켰다.
1817년 평양부서윤에 제수되자, 기자묘(箕子廟)를 수리하고 텅빈 부고(府庫)에 20만냥을 예축하였으며, 부정한 서리(胥吏)로부터 30만냥을 환수하는 치적을 쌓았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판관, 다시 서윤으로 승임되었고,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하자 총호사(摠護使)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던 능의 산역(山役)을 완공시켰다. 그 뒤 사직서령(社稷署令)·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휘경원도감랑(徽慶園都監郎)·광흥창수 등을 역임하고, 1826년 이천부사를 지낸 뒤 1832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매산문집(梅山文集)


【유화주(兪華柱)】

생몰은 1797 ∼1860이며 자(字)는 성집(聖執), 호(號)는 정일재(靜一齋) 또는 경호(鏡湖)이다. 기원(綺園)[휘 한지(諱 漢芝)]의 자(子)이며 특히 글체는 명필이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성환 (兪星煥)】

생몰은 1788 ~ 1849이며, 자(字)는 경여 (景汝), 호(號)는 석란 (石蘭) 또는 경재 (敬齋)이다. 직장(直長)평주(平柱)의 자(子)이며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官)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세환(兪世煥)】

생몰은 1796 ~ 1878이며 자(字)는 문해(文海)이다. 장령(掌令) 휘 한인(諱 漢人) 의 손(孫)이다. 문과급제하였으며 관(官)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장환(兪章煥)】

생몰은 1798(정조 22)∼1872(고종 9)이며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운여(雲汝), 호는 이재·난실(蘭室). 아버지는 직장 평주(平柱)이며, 어머니는 이길모(李吉模)의 딸이다. 집안이 가난하였다.
1826년(순조 2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설서·지평·교리를 거쳐 1829년에는 진하서장관(進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뒤 참의·참판·승지·대사간 등 요직을 지냈고, 안변·경주·양양·강계·회양·파주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또, 1858년(철종 9) 이후에는 강화유수·도총부도총관·의정부우참판을, 그리고 임술민란이 일어난 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민심수습과 치안유지에 힘썼다.
고종 즉위 후에도 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 고위직에 등용되었으며, 1864년(고종 1)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867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순조실록,헌종실록,철종실록,고종실록


【유신환 (兪莘煥)】

생몰은 1801~1859이며,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형에게서 기초 학문을 지도 받아 경사(經史)·자집(子集) 등에 통달하고, 율력(律曆)·산수에 밝았다. 1844년(헌종 10)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전의(全義)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민폐를 근절하였으므로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감사(監司)의 모함을 받아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벼슬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며 후진을 교도하였다.
윤병정(尹秉鼎), 서응순(徐應淳), 김낙현(金洛鉉), 김윤식(金允植) 등 유명한 공경(公卿) ·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 정치·경제·군사적 이해득실을 논하였다. 저서에 《봉서집(鳳棲集)》, 《패동수언(浿東粹言)》,《동유연원(東儒淵源)》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전고문헌(典攷文獻), 봉서집(鳳棲集),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玄相允, 民衆書館, 1949), 한국철학사(韓國哲學史, 유명종 劉明鍾, 日新社, 1980).

 



【유성환(兪晟煥)】

생몰미상, 호는 국포(菊圃)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고종 16년(1879) 2월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교환 (兪敎煥)】

생몰은 1805 ~ 1857이며 자(字)는 문국(文國), 호(號)는 혜산(兮山)이다. 참판(參判) 세환(世煥)의 제(弟)이며 문과급제 하였고 정언(正言)을 지냄. 특히 그림(畵)에 뛰어났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초환(兪初煥)】

생몰은 1819~1893이며 자(字)는 백선(伯善),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헌종 15년(1849년) 진사시 2등[숭정기원후사기유식사마방목 작자미상(규1084 규1420)], 철종 14년(1863년) 식년 문과급제[병과 10등 (조선조방목)]하였다. 기원 유한지(漢芝) 공의 손자로 예서와 전서에 능하셨다. 순조 기묘 유월초이일에 생하시어 현종 15년에 진사시에 2등 급제하시여 성균관에 들어가시어 찰방으로 기유 진사 계해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평안도 용강현령 형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한성부좌윤을 지내셨다. 계사 십월십육일에 하세하시였다. 우의정 박규수 공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용강 현령 유초환(初煥)은 정사에 있어 공정하고 백성을 살필 줄 아는 목민관이라 하여 높이 평가 하였고 이에 고종황제는 이것이야말로 신하의 응당한 본분이니 아주 좋게 여기는 바이다. 품계를 높여 한 임기를 그대로 임지에 있게 하라고 하였다. 유적으로 삼척시 해운정에 양송 전해진다. 저서에 『남강만록』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기환(兪箕煥)】

생몰은 1858~1913이며 1888년(고종 25) 감리부산구통상사무(監理釜山口通商事務)에 이어, 1889년 주차일본판리대신서리(駐箚日本辦理大臣署理)가 되었다. 1898년(광무 2) 군부대신서리(軍部大臣署理) 때 이준(李儁) 등 독립협회 간부들을 투옥, 개화세력을 탄압하였다. 1902년 전권대신으로 덴마크 전권대사 A.파블로프와 조정수호통상조약 및 부속통상장정을 조인하였다. 그뒤 주일한국대리공사로 재임시 김옥균(金玉均)을 상하이(上海)에서 암살한 정부의 자객 홍종우(洪鍾宇)를 중국정부와 교섭, 귀국시켰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음청사(陰晴史), 독립협회연구(獨立協會硏究, 신용하 (愼鏞廈, 일조각一潮閣, 1976)


【유창환(兪昌煥)】

생몰은 1870(고종 7)~1935 , 자(字)는 주백(周伯), 호는 우당(愚堂)이다.
한말의 서예가로 김정희(金正喜) 이후의 일인자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지만 음양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덕을 지닌 우국지사이다. 의병을 조직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고, 향리에 학교를 설립 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남궁훈(南宮薰) 선생과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는 등 영재를 양성하여 국혼을 일으키는데 진력하기도 하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책을 익혀 문장에 통하였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있었다. 글씨는 각 체를 두루 하였는데, 특히 초서(草書)가 돋보여 호건유창(豪健流暢)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입선하였다. 필적으로 경남 사천의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 서울의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규설묘표(韓圭卨墓表)] 등이 있다. 우리 문중의 문장이셨던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 선생의 부친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치숭(兪致崇)】

생몰은 1804∼1878이며, 자(字)는 시현(時顯)이며, 호는 기산(杞山)이다. 참찬(參贊) 휘 하익(夏益)의 후손이며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치선(兪致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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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간공영정(규장각). jpg)

생몰은 1813(순조 13)∼?. 자는 자경(子慶)이다. 인환(仁煥)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서울 출신으로 순조 31년(183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사로 판관의 직에 있으면서, 헌종 10년(184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사과, 대사성,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4년(1867)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계유씨세보(杞溪兪氏世譜)》를 중간하고, 1874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참의, 판서 등을 지내고, 고종 6년(1869)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헌종실록,철종실록,국조방목,청선고(淸選考)



【유치봉(兪致鳳)】

생몰은 1826(순조 26)∼1906이며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 자(字)는 순서(舜瑞), 호는 하산(霞山)이다. 벼슬은 통정의관(通政議官)을 지냈으며, 서화(書畵)에 뛰어났음. 향년(享年) 81세. 산수화를 즐겨 그리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겸하여 잘 썼다고 전해오는데, 유작에 〈십장생도 十長生圖〉(개인 소장)가 전한다. 《홍약루회인시록 紅藥樓懷人詩錄》에 김석준(金奭準)의 찬시(讚詩)가 실려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吳世昌),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 유복열,劉復烈)


【유치형(兪致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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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형공묘소(현민선생부모님). jpg)
위치 : 경기도 하남시 상곡동

 

생몰은 1877(고종 14)∼1933이며 한말의 법률가. 경기도 광주출신. 현민 선생[휘 진오(鎭午)]의 부친이시다.
길준(吉濬) 등 집안의 개화지식인들의 영향을 받고, 1895년 3월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보통과에서 공부하고 1896년 7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동경의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입학하여 3년간 법학을 공부하고 1899년 7월 12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본 사법성과 각 재판소에서 견습을 한 뒤 1899년 11월 귀국하여 이듬해 8월부터 공립 철도학교(鐵道學校) 교사가 되어 1901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1901년 9월 법부의 법률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2월 주영공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임명을 받았고, 이한응(李漢應)의 후임으로 영국으로 부임하기로 되었는데,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천항의 러시아선박이 격침되어 출국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사정이 바뀌자 6월 21일에는 궁내부 회계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제실제도(帝室制度) 정리국비서로 임명되어 1906년 1월까지 근무하였다.
1906년 2월에는 궁내부 제도국 참서관이 되었고, 12월에는 제실재정회의 기사장(記事長)이 되었다. 1907년 6월에는 수학원(修學院) 교관이 되었고, 대동전문학교(大東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민법·해상법 등을 가르쳤다.
1907년 6월에는 궁내부참서관과 궁내부 대궁(大宮) 관방내사과장을 겸임하였다.
1908년 8월에는 궁내부서기관이 되었고, 그달 31일부터는 어원사무국(御院事務局) 이사로 임명되어 3년간 봉직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이왕직(李王職)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는 관직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닫고, 1913년 4월 주식회사 한성은행(漢城銀行) 서무과장으로 취직하여 계속 근무하였다.
저서로는 《헌법》(1907)·《해상법》(1907)·《물권법 1·2부》(1908)·《경제학》(1908) 등의 단행본 교과서들이 있으며, 친필사본으로 《국제법약설 國際法略說》·《일본헌법》·《일기》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유치형일기(兪致衡日記), 개화기 한국법제사료(최종고), 한국의 법률가상 유치형(최종고)



【유진오(兪鎭五)】

생몰은 1808 ~ 1873이며, 자(字)는 경중(景仲) , 호(號)는 사천재(史泉齋)이다.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 휘 한소(諱 漢蕭)의 사손(嗣孫)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선영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진필(兪鎭弼)】

생몰은 1860(철종 11)∼192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우경(右卿), 호는 기헌(杞軒).이다. 예조판서 장환(章煥)의 손자이고, 공조참판 치희(致喜)의 아들로 치량(致良)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이공민(李功敏)의 딸이다.
1879년(고종 16) 진사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얻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 수찬·규장각직각을 거쳤고, 다음해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신기선(申箕善)·지석영(池錫永)을 갑신정변관련자로서 추국(推鞠)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또한 4년 뒤에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지석영의 사면에 반대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비정권하에서 교리·검교·대사성·승지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갑오경장이 시행되면서 다시 등용되지 못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고종실록,국조방목


【유진태(兪鎭泰)】

생몰은 1872~1942이며,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이 창설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민족 자강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김창숙(金昌淑) 등이 프랑스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진정서를 전국 유림(儒林)들을 중심으로 작성 서명하자 평안도 지역을 맡아 서명활동을 하였으며, 이어 김창숙이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갈 때 동행인으로 박돈서(朴敦緖)를 소개해 주었다.

1920년 6월 민족교육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의 설립을 주도하고 교육제도 개선, 지방 순회강연, 도서관 설치 등 교육 계몽활동을 계획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이승만·김규식(金奎植) 등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조선교육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조선교육회의 명칭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로 변경하고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전국 순회강연 및 한글강습회 개최 등을 통한 청년계몽과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23년 1월 서울에서 이종린(李鐘麟)·백관수(白寬洙) 등 20여 개 단체의 대표들이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할 때 그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조선교육회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여 같은 해 4월 2일 개최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유성준(兪星濬)·강인택(姜仁澤) 등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경성 지회장이 되었고, 1930년 11월에 열린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중앙검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5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활발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진오 (兪鎭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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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사진.jpg

생몰은 1906~1987이며 호는 현민(玄民). 서울 출생.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예과 강사를 거쳐 보성(普成)전문학교 법학교수가 되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조선지광(朝鮮之光)》 《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전성기 동반작가(同伴作家)로 《갑수의 연애》 《빌딩과 여명(黎明)》 등의 작품을 썼고, 1938년 장편 《화상보(華想譜)》를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면서 1951년 한일회담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1952년 학계로 돌아가 고려대학 대학원장을 거쳐 총장에 취임하였는데, 1953년 국제법학회 회장에 피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유엔 한국협회장이 되었으며, 1964년 대한교육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 법전편찬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정계로 들어가 신민당(新民黨) 총재가 되어 그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 1970년 신민당 고문에 취임하였다. 1974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에 취임하고, 1980년 통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학술원 공로상 및 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에 《헌법해의(憲法解義)》 《헌법강의(憲法講義)》 《민주정치의 길》 《젊은 세대에 부치는 서(書)》 등이 있고, 문학작품에 《유진오(兪鎭午) 단편집》 《김강사(金講師)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 수상집에는 《구름 위의 만상(漫想)》 《젊은 날의 자화상(自畵像)》 《양호기(養虎記)》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위대한 사상가들(최종고), 한국의 법학자(최종고), 한국법사상사(최종고), 현민유진오의 법사상(전광석)



【유길준(兪吉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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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사진1.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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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전시.jpg)

생몰은 1856~1914이며,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생이며 휘 진수(鎭壽)의 자(子)이다. 1881년(고종 18)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1882년 귀국, 1883년 외무랑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도미(渡美), 보스턴대학을 다녔다.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95년에 탈고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 18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 후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훈1등 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했다. 저서에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영법로토 제국 가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구당시초(矩堂詩)》 《구당선생집(矩堂先生集)》 《세계대세편(世界大勢編)》 《정치학(政治學)》 《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 《이태리 독립전사(伊太利獨立戰史)》 《파란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 《구당서간집(矩堂書簡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서유견문(西遊見聞),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독음청사(續陰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민중의 친우 유길준선생(개벽사편집국), 유길준의 자본주의정신(홍이섭), 유학시절의 유길준을 찾아서(이광린), 유길준 개화사상(김영호), 유길준의 개화사상(서유견문을 중심으로―이광린),군국기무처 의안의 분석(류영익),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류영익)



【유성준(兪星濬)】

생몰은 1860(철종 11)∼1934이며, 한말의 법률가·관리, 일제강점기의 정치가이며 서울출신이다. 휘 진수(鎭壽)의 자(子)이며 개화의 선각자 길준(吉濬)의 친동생이다.
1883년(고종 20)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수학도중에 수신사 일행의 권유를 받고 1885년 1월에 귀국하였다.
5월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가 되었다가 다음 달에 내무부부주사로 옮겼다.
1887년 6월에는 국서이정위원(國書釐整委員)의 명을 받고 일본에 주재하다가 8월에 귀국하여 내무부주사가 되었다.
1891년에는 전운서(轉運署) 사무관이 되어 1893년 5월 조운수선(遭運輸船) 창룡호(蒼龍號)의 수리를 위하여 나가사키항(長崎港)에 있다가 8월에 돌아왔다.
1895년에는 농상공부 회계국장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그해 5월 정부의 명을 받아 일본 요코하마항(橫濱港)에 관세율을 배우기 위한 5인의 견습수세사무(見習收稅事務)에 발탁되어 다시 일본으로 갔다.
11월에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4월에 국사범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3월에 동경부기전문학교(東京簿記專門學校)에 입학하여 8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의 순사교습소에서 순사교습사무를 견습하였다.
1898년 1월에는 동경의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에 입학하여 1년간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명을 받고 1899년 9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국사범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경위원(警衛院)에 체포되어 수개월 수감되어 있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1903년 3월에 황주읍 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하고 서울에 돌아와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해 12월에 통진군수로 임관되었다. 다음해 1월에는 내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고, 지방조사위원이 되었다.
8월부터는 내부 지방국장과 치도국장(治道局長)을 겸하였고, 12월에는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지방관전고위원(地方官銓考委員)과 문관전고소위원(文官銓考所委員)을 겸임하였다.
1907년에는 내부협판에 승진하였고, 관제조사위원(官制調査委員)을 겸하였다.
8월에는 법부 법제국장이 되고, 문관전고소위원장이 되었다. 이해 12월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장 신해영(申海永)의 후임으로 제2대교장이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법전조사국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10년에 충청북도 참여관(參與官), 1926년에 충청남도지사, 1927년에 강원도지사를 역임하였고, 조선물산장려회 1·2대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최초의 《법학통론》(1905)과 국한문 《신약전서》(1916)가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고려대학교칠십년지(고려대학교), 연동교회사(1975), 개화기의 한국법문화(최종고)


【유일준(兪日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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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준박사. jpg)

생몰은 1895~1932이며, 경기도 안성 출생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병균에 대해 연구하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장티푸스 등 여러 병균에 대한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미생물학 교수를 지내면서 후배양성과 세균연구에 힘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과학과 기술(한국과학기술단체연합회,1984)



【유해준(兪海濬)】

생몰은 1917∼1986이며 독립운동가로. 충남 당진출생이다.
합덕보통학교와 예산농업학교를 수료한 뒤 1935년 중국 봉천(奉天)과 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였다.
1936년 김원봉(金元鳳) 일파 주도하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입당하였다가 항저우(杭州)로 가서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였다.
1937년 광둥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 입학하였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재건을 위하여 다시 난징에 와서 한국독립당에 복귀, 항저우잔류인원의 후송 책임을 수행하였다.
1937년 중국 황푸 군관학교(軍官學校) 제15기 제1총대 포병대대 제2대에 배속되어 중국학생과 함께 창사(長沙)·한커우(漢口)·충칭(重慶)·비산(畢山)·청두(成都)로 이동한 뒤 훈련을 받고 청두에서 졸업하였다.
그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의 복귀명령에 따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
1940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전속 부관직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중국전방장사위로부녀회(中國前方將士慰勞婦女會) 회장 쑹메이링(宋美齡)을 방문하여 한국광복군 창설 축하찬조금 10만원을 받아 광복군총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40년 후반 시안(西安)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 10여명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나월환(羅月煥)외 50여명과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 개편되자 광복군 전방사령부 소속으로서 파견근무하게 되었고, 중국군 중위계급으로 제3구대장직을 맡아 간사단한청반(幹四團韓靑班)제1기생을 훈련시켜 졸업시키고 원대복귀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간부로 배속되어 지대장 고운기(高雲起)·지달수(池達洙) 등 간부들과 함께 신편요원(新編要員)이 되어 쑤이위안성(綏遠省) 산바(陝複: 傅作儀의 중국 제8전구사령부 소재지)로 가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최전방 중국 각 부대를 순방하고, 적후공작 거점이 될 마잔산(馬占山)부대가 있던 신민바오(新民堡) 근처의 현(縣)정부 소재지로 이동하였다. 그는 현정부 내에 배속되어 일본의 점령지구인 쑤이위안성 바오터우(包頭)에 잠입하기로 하고 중국 위군(僞軍)에 가입대(假入隊)하였다.
10여일 뒤 위군복장으로 일군 초병의 검문을 뚫고 통과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포섭하였던 최준(崔俊)이라는 자가 일본 헌병대에 자수함으로써, 이를 모르고 있던 그는 징모분처의 간부들과 일본헌병들에 붙잡혀 일본 구주(九州)로 이송되었으며, 오구라(小倉)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7), 한국독립사 하(금승학, 독립문화사, 1965),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국사편찬위원회, 1972),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974), 한국광복군(이현희, 독립기념관, 1990)


【유억겸 (兪億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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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억겸초상화.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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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억겸기념관(연세대).jpg)

생몰은 1895~1947이며, 1909년 계산(桂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20년 귀국 후 중앙고보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연희전문의 법학교수가 되었다. 1934년 흥업(興業)구락부 사건으로 3개월 간 경찰에 구금되었으며, 석방된 뒤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임하고 1937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 부교장을 거쳐 1945년 광복과 함께 교장이 되었으며,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 1946년 미군정의 문교부장, 1920~1947년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연세대학교사(연세대학교, 1969), 진리와 자유의 기수들(연세대학교, 1982).



【유민식(兪民植)】

생몰은 1898~1942이며 이명(異名)은 정근(政根)으로, 1898년(고종 35)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합병하자,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滿洲)로 건너가 만주와 해삼위(海蔘威) 등지를 오가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상하이[上海]로 가서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뒤, 신규식(申圭植)·홍진(洪震) 등과 함께 의정원 충청도 대표로 활약하였고, 계속해서 재정심사위원·예결위원·민단부장(民團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3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을 보좌한 뒤, 이듬해 5월에는 김좌진의 밀명을 받고 신찬우(申贊雨)와 함께 국내로 특파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 출옥한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김혁(金赫)·나중소(羅仲昭) 등이 조직한 재만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회 경리부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27년 2월 김혁 등과 함께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1934년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42년 1월 병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과 옥고의 여독으로 1개월 만에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동아일보,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부출판사, 1983).



【유상근(兪尙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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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근초상화. jpg)

생몰은 1922∼1992이며 교육자이다. 호는 방목이며 충남 부여출신이다. 아버지 원준(元濬)과 어머니 윤원자(尹原子)의 6남매 중 장남(長男)이다.
1953년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관계에 들어가 충청북도 산업국장과 내무부 통계국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1969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통일원차관을 거쳐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관료로서보다는 교육사업가로 더 알려져 있다.
즉, 1956년 명지학원(明知學園)을 설립하여 산하에 명지대학교·관동대학교·명지중고등학교 등 9개의 교육기관을 두는 학원으로 발전시켰으며, 1961년 명지대학장, 1988년 명지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으로서 봉사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려 하였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서 반공교육에도 앞장섰다.
저서로 《행정학개론》·《현대교육과 교양교육》·《한국고대관제사연구》 등이 있다.
1967년 독일연방공화국문화공로훈장,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9년 파키스탄정부의 최고훈장인 '국부의 별'을 받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명지학원40년사(명지학원,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