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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1400~1573
1576~1674
1684~1798
1800~1992
대동보 약사
찾아오시는길
 
 
 
유여해(兪汝諧) 생몰미상
유여주(兪汝舟) 1476 ~1538
유효통(兪孝通) 생몰미상
유응부(兪應孚) ? ~ 1456
유 진(兪 鎭) 생몰미상
유기창(兪起昌) 1437 ~ 1514
유호인(兪好仁) 1445 ∼ 1494
유여림(兪汝霖) 1476 ~ 1538
유백온(兪伯溫) 1492 ∼ ?
유 강(兪 絳) 1510 ~ 1570
유 홍(兪 泓) 1524 ~ 1594

유 영(兪 泳) 1525 ~ 1585
유대수(兪大脩) 1546 ∼ 1586
유대기(兪大祺) 1547 ∼ 1615
유대의(兪大儀) 1549 ∼ 1593
유대정(兪大禎) 1552 ~ 1616
유대진(兪大進) 1554 ∼ 1599
유대칭(兪大?) 1565 ∼ 1634
유대일(兪大逸) 1572 ∼ 1640
유호증(兪好曾) 1533 ~ 1615
유석증(兪昔曾) 1570 ∼ 1623
유진증(兪晉曾) 1573 ∼ 1625


※ 배열 순서 : 항렬순이며, 동항렬(同行列)시 연배순 위의 명(命)자(字), 하(夏)자(字) 는 동항렬(同行列)임.



【유여해 (兪汝諧)】

생몰(生沒)은 미상(未詳)이며, 공(公)은 고려사(高麗史)에 기계유씨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고려 고종때 『최항(崔沆, 무신정권)이 하동감무 노성(盧成)을 죽이다. 노성이 급제한 유여해(兪汝諧) 등과 더불어 시를 지어 최항(崔沆)을 비방하였다하였는데 마침내 노성(盧成)을 죽이고 유여해(兪汝諧) 등을 해도로 유배시켰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제분은 5형제를 두셨는데 장남 형무(逈務)는 관(官)이 사재주부 동정이요, 3자 득선(得瑄)은 관(官)이 상승국부내승 추봉좌복야이며, 5자 득주(得珠)는 주부(主簿)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효통 (兪孝通)】

생몰은 미상이며, 자는 행원(行源)·백원(百源)이며 생원을 거쳐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31년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한약방문으로 된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세종실록


【유응부 (兪應孚)】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충목단.jpg)

위치 : 서울 동작구 노량진구
위치 : 경기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생몰은 ~세조2(1456)이며,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이며 호는 벽량(碧梁). 경기 포천출생,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첨지중추원사·평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중추원동지사로 정2품(正二品)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재상으로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였고 숙종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시조 3수가 전해진다.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추강집, 연려실기술



【유진(兪鎭)】

부제학공묘소및영오제
부제학공묘비

위치 : 전남 고흥군 과역면 호덕리

생몰미상, 1462년(세조8년)에 가을 문과급제, 잡급직 주부(종6품), 1465년(세조11년)에 10월 병조 좌랑(정6품), 1467년(세조13년) 3월 형조 정랑(정5품), 1469년(예종원년) 3월 사헌부 장령(정4품), 1470년(성종원년) 1월 성균관 사예(정4품), 1475년(성종6년) 성균관 사성(종3품), 1477년(성종8년) 12월 예문관 부제학(정3품) 통정대부(당상관), 1478년(성종9년) 4월 홍문관 부제학(정3품) 통정대부(당상관), 1478년(성종9년) 6월 면직, 1481년(성종12년) 7월 성균관 동지사(종2품) 가선대부(당상관)에 서용하였으나 관직에 복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제학공은 옳다고 생각하시면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특히 주역(역리)에 능통하셨습니다. 부제학공의 자제는 네 분이십니다. 휘 구경 공의 묘소는 천안 직산 이북면 수천리에 소재하며, 사헌부 장령공(휘 수경)은 전남 고흥군 대강면 대산리에 소재합니다. 총관공(휘 위지)은 전남 화순군 화순면 서태리에 소재하며, 휘 지문 공은 묘소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부제학공은 임사홍, 임원준 일파의 만행 논죄하시다 파직되었으며 성종대왕께서 다시 서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시지 않으셨으며 만년에 고향 경기 안성을 떠나 전남 고흥에 안주하신 것이 대략 서기 1480년대 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부제학공 후손들은 고흥, 완도, 보성, 여수, 광양, 광주광산, 나주, 화순 등에 산거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 부제학 (副提學) : 조선시대 예문관, 홍문관(弘文館)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 벼슬.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영오연계보(부제학공파보),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용재총화



【유기창(兪起昌)

(서호공묘소, jpg)
(서호공신도비.jpg)

위치 :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생몰은 세종19(1437)~중종9(1514)이며, 공(公)은 무과급제 출신이며, 관(官)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시며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 청절사(淸節祠)에 모셔져 있다.
묘소는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에 계시며 재실(齋室)은 동재궁(東齋宮)이다.

공은 세종19년 정사(서기1437년) 홍성 노은동 내포 외가(박첨)에서 유복자로 출생하여 성삼문가와 외가에서 살았는데 서기 1356년 세조2년 단종복위 사건연루로 성삼문가와 박첨가가 모두 돌육을 당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0세였는데 할 수 없이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비인의 처가 능성구씨댁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공은 정직함으로써 연산조 난정에 간쟁하는데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사적에 대하여 역사서 연산실기술에는 유기창(起昌)공은 기계인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구읍(九邑)의 수령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을 때 연산의 난폭한 정치를 간하다 영의정 성준의 잔당으로 몰려(연산10년 갑자사화) 거제에 유배되었다. 그때 같이 유배된 이가 세 사람이었는데 매양 서로 의지하여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연산의 명을 받아 김오랑이 급히 달려와 그중 한사람을 죽였다. 얼마 후 다시와서 또 한사람을 죽였다. 이제 남은 이는 공뿐이다. 공은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는 바다를 건너 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인들을 불러 작별을 하려하는데 그 사람은 중종대왕이 연산군(연산12년 9월)을 몰아내고 반정을 했다는 기별을 전해왔다. 또 새 임금 중종은 기창(起昌)공에 병조참지의 벼슬을 제수하고 아들 여림(汝霖)에게 한림의 벼슬을 내렸다 했다.
공은 서신을 보고 옛 임금 연산군을 위해 통곡했다. 또 아들 여림(汝霖)에겐 답서를 보내어 너는 새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라 했다. 공은 비록 연산군에 의해 귀양살이를 했을망정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의리를 지켜 홍언충, 김숭조, 남세주 등과 더불어 연산조 4절신의 한분이 되었다.
그후 공은 일체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서호산인이라 자호하고 무의의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중종9년 갑술 10월4일에 졸하니 향년 78세라 유명으로 신주에 옛직함 첨지중추부사만 쓰라고 했다. 졸 후 나라에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예문관제학을 추증하고 숙종46년 경자년에는 강호의 사림들이 공의 청덕을 사모하여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통박동에 청절비를 세우고 아들 여림(汝霖)과 함께 향배 춘추제향을 올리니 공의 청절이 천추만대에 빛나도다. 공의 묘도 비인 판교에 뫼시었다.

아버지 휘 해 공은 진사로 24세에 조졸하였는데 이 어른이 바로 성승과 동서간이다. 그러므로 휘 기창(起昌)공은 사육신 성삼문과 이종사촌이 된다. 공은 아버지 해공과 어머니 죽산박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입신하여 집안의 중흥을 이루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연산군일기, 국조인물고



【유호인(兪好仁)】

 
유호인흉상(함양상림).jpg

경남 함양

생몰은 세종27(1445)∼성종25(1494),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선생은 경남 함양 병곡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뇌계, 자는 극기이며 유음(兪蔭)의 자(子)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에 합격한 뒤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하였고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봉상시 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한 후 1480년에 거창현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陜川)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시(詩) ·문(文) ·서(書)에 특히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뇌계집(?谿集) 7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여림(兪汝霖)】

경안공(휘여림)묘소전경.jpg
경안공신도비.jpg)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리

생몰은 성종7(1476)~중종33(1538), 호(號) 정당(政堂)이며, 1498년(연산 4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504년(연산10년) 식년문과(式年文科)병과 장원 급제했음.

예조판서 경안공(景安公) 유여림(汝霖)은 우리 기계유씨가 조선조에 들어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신 명향이고 학문과 절의 도덕과 큰 국량으로 우리 집안을 크게 빛냈다.
공은 성종7년 병신 1474년에 생하였는데 자는 계옥(啓沃)이요 , 호(號)는 정당(政堂)이며 기계인(杞溪人)이다. 고(考)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諱) 기창(起昌公)이요 비는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성장하며 품성이 영민(英敏)하고 학문에 힘써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부인(貞夫人)은 창녕성씨인데 교리 휘(諱) 희의 손녀다. 휘(諱) 성희공은 성삼문공의 당숙으로 단종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성삼문공이 휘 기창(起昌)공의 이종사촌임을 감안할 때 창녕성씨와 혼사는 대대로 연줄관계에 있었다. 더욱이 휘 기창(起昌)공이 말년에 거제로 유배되어 간 것도 영의정 성준공 사건에 연계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 집안은 공사간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휘 기창(起昌)공이 거제에 유배된 것은 연산10년 갑자사화 때 인데 29세의 경안공(景安公)은 아버지 기창(起昌)공을 모시고 거제까지 갔었다. 이해 12월 공은 문과 급제하여 바로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고 이듬해에는 검열, 주서, 대교가 되었다. 연산조 12년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실각했다. 새 임금 중종은 즉시 휘 기창(起昌)공의 유배를 풀고 병조참의의 벼슬을 내리니 경안공(景安公)이 서신으로 이 소식을 급히 거제에 알려 드렸다. 그러나 휘 기창(起昌)공은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향리 비인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치셨고 다만 아들 경안공(景安公)에게 이르기를 너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훈교 했다.
경안공(景安公)은 벼슬길에 나서 성균전적, 전직강, 사간원종사관, 의정부사인 단양 한산군수 등을 거쳐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시강원보덕, 홍문관직제학.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중종14년 을묘 공44세때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이때 정암 조광조선생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직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명현들이 희생되거나 귀양가고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기준, 정완, 한충) 경안공(景安公)은 파직되어 비인으로 침거했다.
이듬해 중종대왕이 크게 후회하여 경안공(景安公)을 선위사로 삼았다가 동부승지 병조참의에 승진시켰다. 중종18년 전라감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거쳐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공 55세 조정의 육경을 거느리고 권신 김안로 오국의 죄를 논박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비인에 유폐되었다.
마침내 7년의 유폐생활 끝에 중종32년(서기 1537년)에 다시 등용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정치보복을 반대하여 더욱 덕망을 얻었다. 당시 조정의 공론이 장차 정승으로 특배되리라 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공은 63세를 일기로 중종33년 무술 1538년 10월2일에 하세하시니 임금이 놀라워하시고 3일간 정사를 폐하였다. 또한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으며 중종은 경안공(景安公)의 시호와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대제학을 추증하였으며 고양 관산리에 장사지냈다.
※ 신도비는 선조19년(1586년) 공의 손 좌의정(휘 홍)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건립되었으며 신도비각의 건립은 대종회가 고양군의 일부 예산을 지원받아 준공되었다. 영의정 홍언필은 공의 신도비명에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사람됨이 장중하여 집에서는 효제의 도리를 다하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공경의 의무를 다하였으며 사려는 치밀하고 처단은 정확하여 좋은 자리의 내직과 참판 판서 등을 두루 거쳤으나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고 찬하였다. 공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았으며, 모재(慕齋) 김안국과 우의가 두터웠으며 하서 김인후는 공을 따르던 후배중의 한분이다. 저서에는 정당유고 2권이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이름을 빛낸 기계인은 거의가 공의 후손인 까닭에 기계 유씨의 중흥조라 일컫는다.(자손중 3정승 12판서 백인이 문과급제하였다.) 공의 저서 정당유고는 소문(疏文)이 주문을 이루며 부록으로 숙민공[(肅敏公, 휘 강(絳)]의 유고도 있으며 구한말 송병선 권응선 신응선 등이 서문을 쓰고 후손 필환, 치원, 치형(致衡), 치옥 등이 발문을 썼다. 근자(近者)에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중종실록, 국조인물고, 정당유고



【유여주(兪汝舟)】

 
(처사공은행나무.jpg)

처사공과 임벽당김씨묘소
여류시인 임벽당김씨 시비
처사공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위치 :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생 1476 ~몰 1538, 자(字)는 사성(帥聖)이며, 호(號)는 임벽당(林碧堂)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안공[휘 여림(汝霖)]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추천 받았으나, 급제 못하고,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로 일생을 마쳤다. 특히 명필이었다.
부인은 임벽당(林碧堂)김씨로 조선 3대 여류시인(신사임당, 허난설헌)으로 유명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임벽당집



【유백온(兪伯溫)】

생몰은 1492(성종 23)∼?이며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자는 중옥(仲玉), 호는 정산(鼎山). 진주출신이다.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 응시를 단념한 채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후학양성을 업으로 삼았다.
그의 이복형제 둘이 있었는데 그를 해치기 위하여 좁은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를 본 그는 말에서 내려 그들을 간절하게 타이르자 이에 감동된 그들도 차마 해치지 못하고, 그때부터 형제간 우애가 더욱 두텁게 되었다.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정온(鄭溫) 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함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진주성싸움에서 진몰(陣歿)하여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연려실기술, 영남인물고, 증보문헌비고


【유 강(兪 絳)】

숙민공 묘소
숙민공신도비(차산리).jpg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생 1510 ~ 몰 1570, 중종36(154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급제하고 중종5년 경오11월 경진일생으로 신묘진사 신축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인조, 명종, 선조 4대에 걸쳐 승지, 오도관찰사 공조,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셨으며 경오 4월초 10일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졸하셨으며 숙민공(肅敏公) 시호를 받으시고 함경도 문회서원에 향배되었다.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관로가 순타하지 못하였다. 당시 외척 권신인 윤원형을 탄핵하다 여러 지방의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는데 윤원형이 죽은 뒤 한성 판윤 공,형,호조판서를 지냈으며 "30년 입조에 한번도 권세 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다"라는 말로 자손들에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교훈은 남겼다.
또한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關西)의 유생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3년(서기1570년 경오) 공 졸 후 영의정 권철(權轍) 영의정 홍섬(洪暹) 영의정 박순(朴淳) 대제학 박충원(朴忠元) 이조판서 이기 등 공의 생전 막역했던 동료 후배들의 간곡한 주청과 주선으로 양주 차산리 경기내의 명산 차유령하에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에서 내려준 터)에 공의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선조17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월사 이정구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현손(휘 황)이 썼으며 수북 김광현이 전(篆)했다.
경기도 관찰사 재임 중에는 실전했던 고려말 3대 선산을 평택, 안성 등지에서 확인하여 봉축하셨다. 전종중의 성금으로 1987년 정묘 11월에 재실 양효재가 준공되어 장엄한 재실로 공의 유택을 수호하게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명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유 홍(兪 泓)】

충목공(휘홍)묘비
충목사전경3.jpg


위치 : 경기 하남시 산곡리

생몰(1524~1594),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판서 유여림(汝霖)의 손자로, 1549년(명종 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주서(注書), 전적(典籍),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63년 명종대 후반에 정국을 주도하던 권신(權臣) 이량(李樑)을 탄핵하였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도제조로 발탁되었다. 이후에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쳤으며,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명나라의 오해를 풀리게 하고 돌아왔다.

1589년 의금부판사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에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 왕비를 호종하여 해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시사(時事)에 관한 10여조의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가 그의 시를 보고 직접 화운(和韻)하기도 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가장(家藏)한 책이 만여 권에 이르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계곡 장유(張維) , 전서(篆書)는 족손(族孫) 유한지(兪漢芝)가 썼다. 묘표(墓表)는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친필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명종실록,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국조인물지, 국조방목, 송당집



【유 영(兪 泳)】

자산공의 묘소와 숙민공 묘소(원내).jpg
자산공 묘표(충간공의 글씨).jpg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차산리

생몰(1525~1585), 자는 덕제(德濟)이며 명종(1546-1567)때에 문과에 급제하시었는데 방을 부치던 그날 임금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 영(泳)의 집안은 삼세(三世)가 도덕군자이고 오세(五世)가 충효에다 어진 신하가 있었으며 육세가 과거에 급제한것은 매우 드문일이로다 옛날에 한(漢)나라 공신 장랑(張郎)이 오세에 긍하여 재상으로 봉사하였다고 하는데 유씨 집안에 장랑이나 다름없구나" 특히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내리시며 또 물으시기를 "책은 무슨 책을 읽었는고" 하시니 대답하시기를 "본시 집안이 가난하고 늙으신 가친이 계시어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습니다" 고 아뢰었더니 명종께서 서경(書經) 한부를 내주시며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도록 하여라" 고 하시였다 공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경연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의 벼슬이 증직 되었으며 또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 홍문관 부제학, 성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하셨다 숙민공(肅敏公)의 큰 아드님으로 61세에 하세 하시였고 묘소는 숙민공(肅敏公) 친산 서록에 합폄(合?)되여 있으며 증손 관찰사(휘 황)공이 표석을 세우고 5세손 영의정 유척기(拓基) 공께서 묘지명을 쓰셨다.
(양효경통[(11호) 자산공파 화수회 발행] 에서 발췌한 것으로 만취 진국의 회고록에서 지금까지 소개 되지 않은 내용임)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수(兪大脩)】

생몰은 1546(명종 1)∼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영(思永). 진사 함(涵)의 아들이며, 대경(大儆)의 형이다. 이 황(李 滉),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주서가 되고 성균관 전적에 이어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등 10년간 외직을 지낸 뒤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그 뒤 충주목사, 사옹원정(司饔院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내섬시정(內贍寺正)을 겸직하였다. 1584년 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유대기(兪大祺)】

생 1547 ∼ 몰 1615이며 자(字)는 경수(景綏)이며 호(號)는 침연조수( ?淵釣? ) - “깊은 연못에서 낚시하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시호(諡號)는 양간(良簡)이다.
명종 정미생(明宗 丁未生 - 1547년)으로 임진왜란시 선조대왕을 용만(龍灣 - 신의주 옛이름))으로 호종(扈從)한 공훈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에 제수 받으니 종2품 재상에 이르렀으며, 향년(享年) 69세 졸하였다.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되고 함원군(咸原君)에 봉(封)하였으며, <양간(良簡)>의 시호를 받음 ★ 호성원종 1등공신 , 위성원종 1등공신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의(兪大儀)】

생몰은 1549(명종 4)∼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자산군수 영(泳)의 자(子)이다. 어머니는 정 안(鄭 顔)의 딸이다. 공은 강원도관찰사 성증(省曾)의 아버지이다.
1598년(선조 28)에 병조정랑에 제수된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이후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었고 사후에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대정(兪大禎)】

 
휘대정(참판공)제실.jpg

경기 덕양구 일산

생몰은 1552(명종 7)∼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휴(景休). 단성공[휘 호(灝)]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를 거쳐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과 대교를 거치고, 1589년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북평사(北評事)에 좌천되어 가던 도중 파직당하였다. 1591년에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1609년(광해군 1) 충청도관찰사로 승진하였으며, 1612년 동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61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전횡이 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5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비변사당상·병조참판 등에 등용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선조실록,광해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대진(兪大進)】

1554(명종 9)∼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신보(新甫), 호는 신포(新浦). 좌의정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충목공[휘 홍(泓)]의 자(子)이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84년에 이이(李珥)의 천거로 홍문관 직임에 발탁되어 정자·저작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전적·감찰, 공조·형조·호조·병조의 낭관을 지냈다.
1589년 부수찬·헌납, 1590년 이조좌랑·정랑·교리·장령·내섬시정, 1591년 정언·이조참의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고, 1593년 공조참의·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선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연려실기술


【유대칭 (兪大稱) 】

생 1565 ~ 몰 1634, 호(號)는 관원(灌園), 생원(生員), 관은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이르었다. 갑술년(1634년, 享年 70세)에 졸하였다. 청난훈(淸難勳) - 청난원종공신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관원유고(灌園遺稿) 1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관원유고 1권, 경모첩, 부여지



【유대일(兪大逸)】

1572(선조 5)∼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휴(德休), 호는 용은거사(隱居士). 좌의정 충목공[휘 홍(泓)]의 자(子)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600년(선조 33)에 음보로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그 뒤 귀후서별제·예산현감·면천군수·삼척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동지중추부사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기창군 (杞昌君)에 봉(封)에 졌으며, 우참찬(右參贊)에 증직(贈職)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인물고



【유호증(兪好曾)】

 
함경도사(휘 호증)공 묘지석.jpg



함경도사 휘 호증공의 묘지석

생몰은 1533 (선조6년 계유) ~ 1615(광해군7 을묘)이며, 자(字)는 면부(勉夫), 호는 송강(松岡). 1533년(선조6년 계유)에 탄생하셨다. 월정 윤근수(尹根壽)에게 배웠다. 포저 조익(趙翼) 월사 이정구(李廷龜)와 벗하다.
1604년(선조37 갑진)에 성균 진사로 발탁되고 1605년(선조38 을사)에 문과에 합격하여 수찬, 검상, 사인 등을 거쳐 통훈대부에 올랐다. 공께서 여러 지방의 도사를(경상도사,함경도사) 거쳐 경기도 도사로 계실적에 광해혼조를 만나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월정의 제자들인 장유(張維)와 김육(金堉)등으로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1615년(광해군7 을묘)에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리셨다.
이에 숙종시에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송강(松岡)의 학과 덕을 추모하여 추서를 계달하여 정현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제학에 증직되다. 정부인 전의 李씨의 아버지는 선교랑 인개이며, 외조도 진사 원주 변(邊)응경이시다. 아들 세분을 두셨으니 경(木敬)과 육(木郁), 절(木兌)이다. 묘도 경기도 양주 진건면 사능리 산9번지오류동 亥좌 巳향으로 합폄하였으니, 좌의정 송시열이 글을 짓고 관찰사 유황(兪榥)이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참판 유계(兪棨)의 묘갈문과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추기묘지(追記墓誌)가 따로 있다. 따라서 계부인 연안 李씨는 문과부사 성(晟)이 아버지이시니 1624년(인조2 갑자)에 돌아가셨다. 묘는 양주 진건면 사릉리 화유령(꽃네미) 子좌午향에 모셨으니 영의정 유척기의 묘비문이 있다.

2004년(甲申潤月) 봄 길일을 잡아 남양주 진건읍 사릉에 모셔져 있던 공의 분묘를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삼성당리(마석동)의 장자 모계당 경(木敬)의 묘소위에 길지를 찾아 모시고 2005년(乙酉)에는 재실을 마련하여 11월 15일에 첫 세향을 모신 바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방목



【유석증(兪昔曾)】

생몰은 1570(선조 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성(而省), 호는 독송(獨松). 아버지는 봉사(奉事)공[휘 대록(大錄)]이며, 어머니는 김수원(金秀源)의 딸이며, 처부는 이반(李泮)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정랑·예조정랑·지평·형조참의를 거쳐 나주목사·전라감사 등을 지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광해군일기,국조방목


【유진증(兪晉曾)】

생몰은 1573(선조 6)∼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진(而晉), 호는 목오(木塢). 대록(大祿)의 자(子)이며, 전라감사를 지낸 석증(昔曾)의 동생이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광해군이 대비(大妃)를 폐할 때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한 백관이 무려 780여명인데 그 명록 속에 정랑으로 참례하였다.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연려실기술,국조방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