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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1400~1573
1576~1674
1684~1798
1800~1992
대동보 약사
찾아오시는길
 
 
 
유성증(兪省曾) 1576 ∼ 1649
유수증(兪守曾) 1578 ∼ 1636
유무증(兪懋曾) 1580 ∼ 1659
유선증(兪善曾) 1583 ~ 1653
유백증(兪伯曾) 1587 ~ 1646
유 경(兪 경) 1599 ~ 1646
유 황(兪 榥) 1599 ~ 1655
유 철(兪 ?) 1606 ~ 1671
유 계(兪 棨) 1607 ∼ 1664
유 헌(兪 櫶) 1617 ∼ 1692
유명윤(兪命胤) 1629 ∼ 1669

유하익(兪夏益) 1631 ∼ 1699
유하겸(兪夏謙) 1632 ~ 1691
유명일(兪命一) 1639 ∼ 1690
유명뢰(兪命賚) 1652 ~ 1712
유명웅(兪命雄) 1653 ∼ 1721
유명홍(兪命弘) 1656 ∼ 1729
명건(兪命建) 1664 ~ 1724
유명집(兪命集) 1665 ~ 1733
유명악(兪命岳) 1667 ~ 1718
유상기(兪相基) 1651 ~ 1718
유광기(兪廣基) 1674 ~ 1757


※ 배열 순서 : 항렬순이며, 동항렬(同行列)시 연배순 위의 명(命)자(字), 하(夏)자(字) 는 동항렬(同行列)임.




【유성증(兪省曾)】

생몰(1576~1649), 자(字)는 자수(子修) 호(號)는 우곡(遇谷)이시며 광해2(1610년) 사마시(司馬試), 광해11년(1619년) 별시 문과 장원 급제하셨다. 병자 1월28일생 하셨으며 경술 진사 기미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셨으나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사직, 조도사(調度使) 이창정(李昌庭)의 막하로 들어갔다. 뒤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있을 때 영남유생(嶺南儒生)이 이이첨을 논척하는 상소를 하자 그 소문 (疏文)을 쓴 사람으로 지목되어 투옥 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지평(持平)으로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扈從), 척화(斥和)를 주장했고, 그 뒤 장령(掌令)·수찬(修撰)·사간(司諫)·교리(校理)·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는 강화(江華)에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강원도 관찰사·예조참의를 지내시고 기축 1월26일 졸하시니 나라에서는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도비는 효종5년 세웠는데 영의정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자(子) 황(榥)이 글을 썼으며 죽소 김광욱이 전(篆)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광해군일기,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수증(兪守曾)】

생몰은 1578(선조 11)∼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약(子約). 병조참판 대정(大禎)의 자(子)이다.
1605년(선조 38)에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가 시직(侍直)에 전임되고, 같은 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주서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의 막료(幕僚)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찍이 장인 유영경(柳永慶)이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세자로 삼으려 하였던 사실로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탄핵을 받자 관직에서 물러나 동교노원(東郊蘆原)에 은둔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며 10여년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함흥부통판을 거쳐, 형조·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 전적·사예를 거쳐 1635년 장령, 이듬해 필선에 이어 강계부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무증(兪懋曾)】

생몰은 1580(선조 13)∼1659(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성(汝省). 조부는 충목공(휘 홍)이며 아버지는 청풍군수 대술(大述)이며, 어머니는 별제(別提) 홍반(洪磻)의 딸이다. 1634년(인조 12)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있다가 동반(東班)으로 서용되었으며, 이듬해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였고, 이듬해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그 뒤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안협현감 등을 역임하고, 1646년에는 공신회맹(功臣會盟)에 참가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 1658년(효종 9)에 기안군(杞安君)에 봉(封)해졌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국조인물고


【유선증(兪善曾)】

생몰(1583 ~ 1653), 관직 : 청도군수(淸道郡守), 자(字)는 계성(季省), 함원군(咸原君) 휘 대기(諱 大祺)의 자(子), 선조 계미년(1583년)에 출생하였다. 임자년( 1612년,광해 4년)에 진사가 되고, 관직은 청도군수(1645년 ~ 1647년)에 이르렀다. 인조 계해년(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훈작이 내려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병자호란(1636년, 인조14년)이후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술년(1658년) 4월 16일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배위는 신평송씨로서 부친이 첨추 李公(휘 기원)인데, 계사년(1653년) 2월9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충청도 청양군 운곡면 위라리 언덕에 경향(서향)으로 쌍분을 썼다. 장령 허후(許厚)가 찬술한 묘표는 8대손 치형(致亨)이 명(銘)을 추기하였고, 7세손 창환(昌煥)이 전자(篆字)를, 9세손 진호(鎭浩)가 글씨를 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백증(兪伯曾)】

 
기평군(휘 백증).jpg


생몰(1587-1646), 자선(子先). 호 취헌(翠軒). 시호 충경(忠景).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였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 기평군(杞平君)에 봉(封)해졌다. 1624년(인조 2) 사간 때 김신국(金藎國) ·조성(趙誠) 등을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부응교 때 남이공(南以恭)이 불법을 자행한다고 논박하였다가 이천(伊川)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사도시정(司 寺正)이 되어 화의의 잘못을 소론하였다. 1629년 이조참의 때 안일한 대신들을 비난, 다시 수원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부제학 등을 지내고,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副摠管)으로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화의를 주장한 윤방(尹昉) ·김류 등의 처형을 상소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637년 화의 성립 뒤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어, 신주(神主)를 모독한 윤방을 탄핵하였다. 국가 자강책을 올린 뒤 사직 낙향하였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기평부원군(杞平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문집에 《취헌소차》 3권 3책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연려실기술,청선고(淸選考)



【유 경(兪 木敬)】

생몰은 1599년(선조32기해)~1646년(인조24 병술)이며 관(官)은 통덕랑이다. 자산공[휘 영(泳)]의 2자이신 선무랑공[휘 대의(大儀)]의 장자인 도사공[휘 호증(好曾)]의 3자중 장자로 자(字)는 무백이요, 호는 모계당(慕溪堂)이라 사계 김장생 선생이 호를 지으셨으니 慕는 옛 성인을 사모함이요, 溪는 물이 흐르는 근원이라 또는 잠암(潛庵)이라 한다. 뜻인즉 출세치 못했다는 의미. 1599년에 출생하시여 시남[휘 계(棨)]의 종형 유 재와 더불어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월정 윤근수(尹根壽)에게 예(禮)를 물었으니 그 학(學)과 덕망(德望)이 높았었다.
광해혼조를 지탄하시며 세상에 나가시지 않으니 사람들은 잠암(潛庵)이라 부르시다. 일직(逸職)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경연동지에 가했으며, 냉정동에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사계(沙溪)의 제자가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국태민안이 회복되어 정사가 안정될 무렵, 영상인 월사 이정구가 상(임금0에게 아뢰어 사계의 수제자인 경(木敬)을 기용토록 고달하니 상께서 좌승지의 직첩을 주어 부르시니 혼조를 마다한 臣이 어찌 성조를 받들 수 있으리오 이는 쓰면 내뱉고 달면 삼키는 속된 도리라 臣에게는 벼슬의 체질에 부당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시다.
임금은 이 말을 들으시고 참으로 어진 선비라 하고 업적을 내리시었다. 인조24년 1646년 9월 29일에 돌아가시니 숭정대부 좌찬성 겸 지경연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二師)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포천시 신북면 삼성당리 마석동(암) 산 65번지에 배 죽산朴씨와 계향에 合?으로 모셔져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 황(兪 榥)】

 
관찰사(성증)공의 묘소(참배객이 있는곳)와 충간공(황)의 묘소.jpg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차산리

생몰(1599-1655), 자(字)는 전숙(典叔), 호(號)는 봉주(鳳洲),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인조 11년(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급제하였다.
선조32년(1599년) 기해 4월28일 서울 서소문 반송방에서 출생하셨으며 성장하면서 품성이 영민하고 총명절인하여 모두들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고 촉망 하였다. 17세 되던 해에 월사 이정구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며 월사선생이 애중하고 격려하였다. 인조2년 26세되던 해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태학에 들어갔다. 인조11년 35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6월에 부정자를 거쳐 성균관봉적(成均館 籍) 을해년 36세에는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14년 병자에는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시 정언이 되었는제 이때 청나라 심양에 갔던 나덕헌 등이 청의건국을 축하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이해12월 청나라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병자호란) 공은 아버님 관찰사공(省曾)을 모시고 강화로 들어갔다가 관찰사공은 갑곳파수대장이되고 공은 서호순검사가 되어 즉시 떠났다 급히 군대를 정비하고 사병을 모집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강화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의 인조대왕이 청군에 항복됨에 따라 2월에 서울로 돌 와 왔다. 이때 조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청군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척화신들을 처벌하자는 논란이었다. 주전론자 김상헌과 삼학사들은 청나라로 끌려갔고 정온은 칼로 배를 갈랐다. 이때 문중의 충경공 유백증(伯曾), 문충공 유계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수 백년 걸친 우호와 임진왜란 당시 대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와준 의리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가 친명반청의 정책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므로 척화를 주장하다 청나라의 압력이 강경하기 때문에 공은 마침내 단양에 유배되었다. 얼마 아니 되어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벼슬이나 세상에 일체 인연을 끊고 선유동에 우거하며 주자절요를 탐구하는데 전심하였다. 이때 마침 아버님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기 때문에 집을 강원도 안협현으로 옮겨 살면서 귀양 와 있는 회곡(晦谷) 조한영과 교유하였다. 인조17년 다시 등용되여 호조좌랑, 춘추관 서기관이 되고 이듬해 예조정랑에 승진되고 충청도사가 되었다. 얼마 안되여 벼슬을 떠나 청풍 로촌리로 들어 갔으며 이듬해 43세때엔 동양위 신익승과 함께 단양도담을 유람하고 이어 회덕으로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을 찾아 학문과 세상사를 논했다. 겨울에 청풍로촌리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6월 교리에 임명되였는데 이후 기축년에 병조참지, 경연참찬관, 좌부승지,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2년에는 다시 춘추관수찬관이 되고 좌승지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서천군수로 나갔다 효종4년에 조정에 들어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계모상을 당했다. 이듬해 겨울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효종6년 을미(1655년) 4월16일 57세로 졸하였다. 공 졸 후 100년(영조32년) 충간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국원1등공신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성균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성이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학문이 넓고 깊었다. 또 항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평생 정도와 절의로써 처신하였으니 인조, 효종, 양조의 명신으로 추앙 받았으며 저서에 봉주집이 있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이 전(篆)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고




【유 철(兪 ?)】

 
대사헌(철)공의 묘소와 2기의 시비.jpg


생몰(1606-1671), 자는 방숙(方叔), 호는 취옹(醉翁),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을 거쳐 사간에 재직 중 친청파(親淸派)로서 명나라를 피하고, 청나라에 사대의 예(禮)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된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 가족들에게 은휼(恩恤)을 베풀게 하였다.
1652년(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으로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신(臣)이라 칭한 승지 유도삼(柳道三)의 파직을 주장하여, 효종의 노여움을 사 진도(珍島)에 위리안치 되었다. 여러 대신들의 무마로 1개월 만에 방환, 현종 초에 복관되어 대사헌을 지냈다. 문집에 《취옹집》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승정원일기,연려실기실,국조방목,국조인물고,청선고(淸選考)



【유계 (兪棨)】

생몰(1607~1664),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 설서(說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林川)에 유배되었고 1639년 풀려났으나 벼슬을 포기, 금산(錦山)에서 학문을 닦았다. 1644년 주서(注書)로 기용되어 1646년 무안현감을 지냈고 1649년 부교리 때 인조가 죽자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 예론(禮論)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이어서 인조의 묘호 문제로 다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58년 송시열(宋時烈) 등의 천거로 문학(文學)에 등용되었다.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논박 제거했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신병으로 사직했다. 성리학에 밝고 예론과 사학(史學)에 정통하였다. 1714년(숙종 40) 간행된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사후(死後)에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편자(編者)의 주장은 전혀 없이 윤선거(尹宣擧)와 같이 편찬했다고 하는데,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유계(兪棨) 혼자서 편술한 것이라고 하여 노·소론의 분쟁까지 있었다.
임천 칠산서원(七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가례원류(家禮源流)], [시남집(市南集)], [여사제강(麗史提綱)], [강거문답(江居問答)]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시남집,국조인물고,전고문헌(典攷文獻)



【유 헌(兪 櫶)】

생몰은 1617(광해군 9)∼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회백(晦伯)이고, 호는 송정(松汀)이다. 군수 희증(希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성 구씨로 성남(成男)의 딸이다. 1665년(현종 6)에 호조좌랑으로 재직 중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66년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어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익년 정월 대신 허적(許積)을 과격하게 비판한 죄로 부령에 유배되었다. 1670년 지평으로 복직하여 공주들의 저택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것을 간쟁하였다. 이어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강계부사로 나갔다가 12월에 승지로 승진하여 돌아왔다. 1680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다시 승지로 복직하였다. 1682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군사의 정원을 축소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후에 도승지와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숙종실록,국조방목,호보(號譜)


【유명윤(兪命胤)】

생몰은 1629(인조 7)∼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윤보(胤甫). 시남[휘 계(棨)]의 자(子)이다. 아버지로부터 수학한 뒤 1644년(인조 22)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유학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9년 설서가 되었으며, 승정원주서·수찬·홍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검열이 되었으나 부자상피법(父子相避法)에 의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다시 사직(史職)에 임명되었으며, 병조좌랑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대교에 임명되었으며, 호남지역을 순찰하고 돌아와서 왕에게 농사일과 백성들의 생활상에 대한 수 천언을 아뢰어 이들의 역(役)을 줄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듬해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안으로 양생(養生)하는 예를 행하고 경애를 갖추었으며, 만년에 더욱 성리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을 애독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효종실록,현종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하익(兪夏益)】

생몰은 1631(인조 9)∼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겸(士謙), 호는 백인당(百忍堂). 필선 수증(守曾)의 손자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사서·정언·부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황해도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수령들에게 신상필벌하여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그뒤 이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숙청될 때 함께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되자 풀려나와 도승지에 등용, 그뒤 이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사고(史庫)의 보존에 대하여 소를 올려 사고의 보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1690년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사헌·좌참찬·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 같이 삭출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현종실록,숙종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지,번암집(樊巖集)


【유하겸(兪夏謙)】

 
휘하겸(경주부윤)묘소.jpg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생몰(1632∼1691), 공은 아버지 극(極)공(통덕랑 증 호조참판)과 어머니 풍산홍씨(父郡守洪霆공의 녀)의 차남으로 1632년(인조10년)에 출생하여 3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죽산박씨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훈육으로 성정이 온순 침착하였고 숙부인 비(?)공(청도군수증이조판서)을 스승으로 향학열이 남달리 높아 학식이 날로 높아지고 인격이 원만하며 언행이 신중 근엄하였다. 공은 1672년 시월(현종13년) 41세에 문과급제하여 다음해에 승문원부정자로 임명되었고 43세에 도찰방과 45세에 승정원주서 춘추관사를 거쳐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지평이 되었다. 1676년(숙종2년)에는 동지사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하여 성균관 직강이 되고 1678년에는 사헌부장령 간성군수 1679년 성균관 사마시 시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80년에는 목민관으로 영남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경신정변으로 잠시 은거하다가 진주목사와 선산부사를 거쳐 1683년에 증광사마시시관과 종성부사를 역임한 후 1689년 예조참의 재직시 기사환국의 정변 후에 동부승지로 임명되고 곧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같은 해 가을에 가선대부 직위인 경주부윤으로 영진하여 선정으로 목민활동에 전념하던 중 관내 기계현 현지 고로들의 증언과 고증으로 기계유씨 문중의 오랜 현안인 시조묘소 추심사업을 완결하여 1689년9월에 시조묘소를 사초하고 다음해 1690년5월에 4촌형 예조판서 하익공의 친필로 신라아찬유공지묘(新羅阿飡兪公之墓)라는 표석을 세웠다. 공은 1691년3월에 좌부승지로 재임명되었다가 8월에 청송부사로 전임 2개월 후인 10월 27일 향년 60세로 임지에서 별세하여 고양시덕이동증조 참판공 묘소 가까운 곳에 뫼셨으며 배(配) 정부인창녕성씨[(부호군성찬,父 護軍成)공의 여]는 천수를 다하여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슬하에는 장녀와 장자 함창현감 도중 차자(次子) 통덕랑(通德郞) 의중(義重)이며 손자는 통덕랑 언규(彦揆), 언진(彦振), 언정(彦廷), 진사 언석(彦錫), 증손자는 한덕(漢德), 한담, 한망(漢望), 한노(漢老)이고 현손은 주주(?柱) 외에 많으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단성공의 5세손으로 문과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감에 있어 선공후사의 정신으로 여러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특히 우리 기계유씨 문중의 오랜 숙원인 시조묘소 찾기 사업을 완결한 공적은 종사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신도비문중에서>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명일(兪命一)】

생몰은 1639∼1690(인조17∼숙종16)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만초(萬初).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비(?)의 자(子)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여 1669년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고, 이어 전옥서(典獄署)와 장흥고(長興庫)의 봉사를 거쳐 사도시직장(司도寺直長)·공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거쳐 지평으로 재직중 남인 박태유(朴泰維)를 탄핵하고, 이어 남인인 장령 홍수주(洪需疇)를 논핵하여 파면하게 하였다. 1685년 장령으로 경기도암행어사가 되고, 이듬해 사간에 전직, 168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유명뢰(兪命賚)】

생몰(1652~1712)이며 호(號)는 자교당(慈敎堂)이며, 충간공[휘 황(榥)]이 50세에 가깝도록 유씨 부인에게서 후사가 없이 하세함으로 당질 명기(命夔)를 계자(系子)로 삼았다. 삼종제 시남 공이 속현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처음에는 [무슨 속현이냐] 웃어 넘겼으나 수삼차 권고에 못 이겨 시남공의 주선으로 우암(尤庵) 선생의 재종 시욱의 딸을 재취 부인으로 삼았다. 이 송부인에게서 효종(孝宗)3년 임진(壬辰, 1652년) 6월14일 午時에 생하시었다. 자는 필경(弼卿)이며 우암 선생께서 자교당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충간공(忠簡公)이 효종(孝宗)6년 을미(乙未)에 57세로 졸(卒)하니 이때 공(公)의 나이 겨우 4세이다. 충간공(忠簡公)은 임종(臨終)에 부인송씨(夫人宋氏)와 아우 대사헌공(大司憲公)에게 어린 아들의 훈육(訓育)을 유언(遺言)으로 남겼다.
公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세가 단정하였지만 어머니 송씨(宋氏)부인은 항상[과부의 아들]이라는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또 품성이 높은 송씨부인은 사서(史書)에도 통달하여 어린 公에게 소학통감(小學通鑑) 등을 가르쳤다. 이런 연유로 해서 우암선생(尤庵先生)이 후일 公에게 자교당(慈敎堂)이라는 별호(別號)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20세때 당숙(堂叔) 도승지공(都承旨公)이 교관(敎官)이 되었는데 이에 취학(就學)하여 여러 아이들과 어울렸다. 무신(戊申)년 17세때 반남박씨와 결혼하고 우암(尤庵) , 동춘(同春) 양(兩)선생을 찾아 뵈었는데 우암 선생(尤庵先生)은 어머니의 친정집 어른이요 동춘(同春)선생은 아버지의 막역한 친구라 양(兩)선생은 모두 공이 늠름하게 성장한 것을 기특하게 여겨 애중(愛重)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公은 숙부(叔父)의 엄한 훈교(訓敎)로 과거공부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나 20세 때 숙부(叔父) 대사헌공(大司憲公)의 상(喪)을 당하고 이어 갑인(甲寅)으로부터 나라의 정사(政事)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일체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7년간 단양(丹陽) 산골로 들어가 살았다. 이 사이 백형(伯兄)의 경산임지(慶山任地)로 갔다가 우암선생의 유배지를 찾아 선생의 가르침으로 성리학(性理學)의 제서(諸書)를 섭렵하였다. 다시 양주(楊州) 선영하(先塋下)에 돌아와서 후학들을 가르치니 내학자(來學者)가 심히 많았다.
숙종36년 경인에 민진후공(閔鎭厚公)이 公이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천거하여 제배(除拜)되었으나 [다 늙은게 무슨 벼슬이냐]하고 취임하지 아니하였으며 60평생 벼슬이라곤 미관말직도 아니하였다. 20년간 우암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고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岩) 정호(鄭澔), 삼연(三淵) 김창흡,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지촌(芝村) 이희조( 李喜朝),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등 당대 명류(名流)들과 추허(推許)를 받으며 선우(善友)하였다.
여러 번 정변(政變)을 치르면서 스승의 비명을 겪었고 사우들의 곤욕도 보면서 항상 학문에 정진하며 자세가 의연하니 사림의 존경을 받았고 학문상의 문제나 조정의 일까지도 어떤 물의가 있을 때는 公의 장자다운 의견이 가장 존중되었다.
우암 선생은 생전에 공의 애지중지하였고 주자학에 바탕을 둔 선생의 학문을 이어 받았으나 그 중에도 예학에 가장 조예가 깊어 저서에 疑禮問答(의례문답)3권 등이 있다. 숙종38년(임진) 4월4일 향년 61세로 하세하시니 나라에서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웅(兪命雄) 】

생몰은 1653(효종 4)∼1721(경종 1). 자는 중영(仲英),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석(晳)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682년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에 사헌부 정언 · 지평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른 서인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자 사헌부 장령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696년 금성 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 일로 암행어사 여필용(呂必容)에 의해 천거되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707년 황해도 관찰사, 1718년 형조 판서, 1720년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경종 1년(1721)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해서를 잘 썼다. 시호는 온간(溫簡)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국조방목,겸산집(兼山集),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유명홍(兪命弘)】

생몰은 1655(효종 6)∼1729(영조 5). 자는 계의(季毅), 호는 죽리(竹里), 석(晳)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숙종 8년(168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8년 지평이 되었으나 이듬해 기사환국 때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자 등용되어 장령을 역임하였다. 1702년 궁가(宮家)에서 행해온 절수(折受)의 폐해를 상소하여 백성을 심히 괴롭히는 것을 모두 재감(裁減)시키자고 진언하였다. 경종 1년(1721) 한성부 좌윤·전라 감사가 되었으나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1725년 재 등용되어 대사간이 되고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영조 2년(1726) 한성부 판윤, 1727년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헌(章憲)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


【유명건(兪命建)】

 
(나주목사공휘명건신도비.jpg)



위치 :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삼은리

생몰(1664 ~ 1724), 자(字) : 중강(仲强)이며 대사헌(大司憲) 휘 철(諱 ?)의 자(子)이며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사위이다. 생원(生員)을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음.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경기 안성에 있다. 기계유씨 가문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집 (兪命集)】

생몰은 1665~1733이며 자(字)는 여성 (汝成), 호(號)는 서주 (西州)이다.
선(善)을 좋아하고 도(道)를 즐겼다. 무신란(1728년)에 문덕린(文德麟)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분전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명악(兪命岳)】

 
청주목사공묘소전경.jpg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생몰(1667-171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군사(君四). 대사간 철(?)의 자(子)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김창흡(金昌翕)에게서 배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94년 갑술옥사로 송시열이 신원(伸寃)되자 벼슬에 뜻을 두고 17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의금부도사가 되고 지방의 수령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도곡집(陶谷集)



【유상기(兪相基)】

생몰은 1651(효종 2)∼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공좌(公佐), 호는 기초재(祈招齋). 이조참판 계(棨)의 손자이며, 이조정랑 명윤(明胤)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01년(숙종 27)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 출사하여 벼슬이 용담현령에 이르렀다.
조부(祖父)이신 시남공[휘 계(棨)]의 저서인 《가계원류 家禮源流》를 간행할 때에, 스승 송시열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하였다고 윤증(尹拯)을 공격한 정호(鄭澔)의 발문으로 소론의 공격을 받고 나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윤집(尹集)의 문집을 불사르고 노론이 득세하면서 풀려나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송추(松楸)에 돌아와 조부(祖父)의 이력을 적은 [시남연보(市南年譜)]와 [계사왕복서(癸巳往復書)] 등을 지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시남연보,계사왕복서(癸巳往復書), 장암집(丈巖集, 정호鄭澔)


【유광기(兪廣基)】

생몰(1674 ~1757), 자(字)는 인백(仁伯), 호(號)는 괴헌(槐軒)이다. 자교당(慈敎堂) 휘 명뢰(諱 命賚) 의 장자(長子)이다. 현종 갑인생(顯宗 甲寅生 - 1674년)이며 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 )를 역임하였다. 『괴헌유고(槐軒遺稿)』 2권을 남겼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차산리 선영에 안장되어 계신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