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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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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1992
대동보 약사
찾아오시는길
 
 
 
유우기(兪宇基) 1684 ~ ?
유최기(兪最基) 1689 ~ 1768
유척기(兪拓基) 1691 ~ 1767
유숙기(兪肅基) 1696 ~ 1752
유언명(兪彦明) 1666 ∼ ?
유언철(兪彦哲) 1687 ~ 1744
유언술(兪彦述) 1703 ~ 1773
유언지(兪彦摯) 1706 ~ 1776
유언민(兪彦民) 1709 ~ 1773
유언집(兪彦鏶) 1714 ~ 1783
유언현(兪彦鉉) 1716 ~ 1790
유언호(兪彦鎬) 1730 ~ 1796
유한소(兪漢蕭) 1718 ~ 1769
유한갈(兪漢葛) 1722 ~ 1795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유한인(兪漢人) 1741 ∼ 1808
유한녕(兪漢寧) 1743 ~ 1795
유한지(兪漢芝) 1760 ~ 1834
유만주(兪晩柱) 1755 ~ 1788
유병주(兪秉柱) 1778 ∼ 1840
유화주(兪華柱) 1797 ∼ 1860
유성환(兪星煥) 1788 ~ 1849
유세환(兪世煥) 1796 ~ 1878
유장환(兪章煥) 1798 ∼ 1872


※ 배열 순서 : 항렬순이며, 동항렬(同行列)시 연배순 위의 명(命)자(字), 하(夏)자(字) 는 동항렬(同行列)임.




【유우기(兪宇基)】

생몰은 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재(大哉), 호는 경도암(景陶庵). 명홍(命弘)의 아들이며, 명중(命重)에게 입양되었다.
판관으로서 1739년(영조 1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1741년에 헌납, 이듬해에 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수찬에 재직하고 있을 때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자, 하늘의 뜻을 헤아려 임금은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른 정치를 행하도록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43년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으로 사헌부장령에 제수되고, 동지사·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헌납·사간·응교·세자시강원필선·집의·보덕 등을 거쳐 1749년 승지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청선고(淸選考)


【유최기(兪最基)】

생몰(1689~1768), 자는 양보(良甫). 호는 자락헌(自樂軒)·무수옹(無愁翁)이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3년 뒤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정미환국 때 소론의 거두 이광좌(李光佐)의 횡포를 반박 상소하다가 삭직되었다. 1729년 다시 지평으로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거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 命)의 신원(伸寃)과 소론의 음모사실을 상소 논박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1747년(영조 23) 병조참의가 되어 이광좌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주청하다가, 웅천(熊川)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1763년 영조가 70세 때 추은(推恩)의 뜻으로 정헌(正憲)에 특진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68년 의금부판사 ·우참찬에 이르렀다. 저서는 무수고(無愁稿) 15권을 남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호보(號譜), 풍고집(楓皐集)


【유척기 (兪拓基)】

(지수재공묘소전경.jpg)
(지수재문익공초상화2. jpg)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해5리

생몰은 1691(숙종 17)~1767(영조 43)이며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 문익(文翼)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급제, 한원(翰苑) ·삼사(三司)를 거쳐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책봉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집권한 소론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홍원현(洪原縣)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르자 앞서 세자 책봉문제에 연좌되었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 命)을 복관시키고 유봉휘(柳鳳輝)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재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만년에 이천보(李天輔)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다시 등용되었다가 사퇴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에 [지수재집(知守齋集)](15권)이 있다. 특히, 금석학에 뛰어났으며 기계유씨문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해5리 논골에 뫼셔져 계십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경종실록,영조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지,지수재집,은파유고(恩坡遺稿)



【유숙기(兪肅基)】

생몰(1696~1752), 자 자공(子恭)이며 호는 겸산(兼山). 단양 출생. 김창흡(金昌翕)에게 배웠다. 1715년(숙종 41)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과는 통과하지 않았다. 송산(松山)에서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교하(交河)의 매음(梅陰)으로 옮겨 제자들을 가르쳤다. 1733년 명릉참봉으로 등용되어 효릉참봉 ·상의원직장 ·종부시주부 ·금구현감 ·임피현령 ·전주판관 등을 지냈다.
일생을 경학(經學)과 성리학에 힘썼으며, 수령으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치적으로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였고, 경종대에 소론에게 죽임을 당한 윤지술(尹志述)의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저술로 [태극도설차의(太極圖說箚疑)], [중용차의(中庸箚疑)], [서경차의(書經箚疑)]가 있다. 문집으로 《겸산집(兼山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겸산집,호보,


【유언명(兪彦明)】

생몰은 1666(현종 7)∼?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용회(用晦). 판관 정기(正基)의 자(子)이다. 1699년(숙종 25)에 통덕랑으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03년 지평으로 있을 때에 북성(北城) 쌓는 일을 중지하고 기민을 구하라는 상소를 올려 왕이 가납하는 등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박세당(朴世堂)의 훼경(毁經) 사실을 놓고 노론들이 논란을 벌일 적에 이를 옹호하여 소론의 소장으로 지목을 받았다.
1705년 소론 임보(林溥)와 남인 이잠(李潛)이 세자(世子:뒤의 景宗) 모해설이 있다고 노론 김춘택(金春澤)을 공격하였는데, 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그 뒤 그의 아버지가 후취(後娶)의 행실을 들어 이혼하여줄 것을 청하였는데, 처음에는 여러 대신들이 의논하여 이혼을 결정하였으나 음행의 사실이 없어 국전(國典)에 어긋난다 하여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뒤 계모는 관아에서 언명에게 죄를 전가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누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변명도 못하고 관계에서 물러났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재상 윤지완(尹趾完)도 칭송한 바 있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숙종실록,국조방목,국조인물고


【유언철(兪彦哲)】

생몰은 1687(숙종 13)∼1744(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명(原明). 부윤 명일(命一)의 손자이며, 덕기(德基)의 자(子)이다. 1717년(숙종 43) 사마시에 합격하여 다음해 정릉참봉에 제수되었다. 형조좌랑을 거쳐 고령현감이 되어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여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자, 경상감사 황 선(黃 璿)에게 보고하고 고령·지례 양 읍의 병사들을 이끌고 합천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1등에 녹훈되었다. 관(官)은 부사에까지 올랐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송호집(松湖集)


【유언술(兪彦述)】

생몰은 1703(숙종 29)∼1773(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지(繼之), 호는 송호(松湖)·지족당(知足堂)·서고(西皐). 부사 명일(命一)의 손자이며, 진사 복기(復基)의 자(子)이다. 1729년(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6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에 뽑혀 검열이 되었다.
1744년 6품직에 올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정랑을 거쳐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간으로 있을 때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이광좌(李光佐) 등을 성토하였고, 1749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772년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직간을 잘하여 영조에게 인정되었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족숙인 유척기(兪拓基)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송호집》 6권을 남겼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송호집(松湖集)


【유언지 (兪彦摯)】

생몰은 1706 ~ 1776이며 자(字)는 은경 (殷卿), 호(號)는 양호재(養浩齋)이다. 숙종 병술생( 肅宗 丙戌生 - 1706년)이며, 무과(武科)급제하였으며, 홍주목사(洪州牧使), 가의대부 동중추부사(嘉義大夫 同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모셔져 있으며 저서는 [양호재유고(養浩齋遺稿)] 2권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양호재 유고 2권


【유언민 (兪彦民)】

생몰은 1709~1773이며 자는 이천(伊天), 호는 석은(石隱)·기재(棄齋)이다. 1732년(영조 8) 진사가 되어 도사(都事), 직장, 좌랑을 지냈다. 174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8년 장헌세자가 평양에 밀행할 때, 당직으로서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삭직되었다. 뒤에 복관되어 이조참의 ·대사성 ·예조참판을 거쳐, 1771년 도승지에서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석은집(石隱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국조방목


【유언집(兪彦鏶)】

생몰은 1714~1783이며, 자는 사호(士鎬)이며 호는 대재(大齋), 돈령부영사 언호(彦鎬)의 형(兄)이며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가 되었다. 1778년(정조 2)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1783년 돈령부도정(都正)으로 있으면서 원자(元子)를 보도(輔導)하였다. 편저서에 《오복명의(五服名義)》가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정조실록,호보


【유언현(兪彦鉉)】

생몰은 1716 ~ 1790년이며, 자(字)는 중필 (仲弼)이다. 숙종 병신생(肅宗 丙申生 - 1716년)으로 영중추(領中樞) [휘諱 척기(拓基)]의 자(子)이며 생원(生員)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언호(兪彦鎬)】

(충문공영정(규장각). jpg,
(충문공묘소전경.jpg)


위치 : 경기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

생몰은 1730~1796이며, 자는 사경(士京), 호는 즉지헌(則止軒)이며 시호 충문(忠文)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檢閱) ·설서(說書) 등을 지냈다. 벽파로서, 시파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정치를 없애는 것이 청의와 명분을 살린다고 생각한 정치적 모임인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타파하고자 한 영조로부터 흑산도로 정배 명령을 받았다. 정조 즉위와 함께 시파로 태도를 바꾸어 정조의 총애를 받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로 발탁되었으며, 이조참판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 형조판서가 되었다.
1787년 우의정으로서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중추부판사로서, 조덕린(趙德 )사건으로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 풀려나오고, 1795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에 이르렀다.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즉지헌집(則止軒集)》, 저서에 《연행록(燕行錄)》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정조실록,순조실록,국조방목,명의록(明義錄), 은파산고(恩坡散稿)



【유한소(兪漢蕭)】

생몰은 1718 ~ 1769이며 자(字)는 여인(汝人), 호(號)는 아재(雅齋)이다, 자교당[(慈敎堂, 휘 명뢰(諱 命賚)] 의 사손(嗣孫)이며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다. 관(官)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비문(碑文)은 영종대왕 어제비문(英宗大王 御製碑文)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영조실록


【유한갈(兪漢葛)】

 
소요헌공영정.jpg

생몰은 1722 ~ 1795이며, 자(字)는 여수(汝水), 호(號)는 소요헌(逍遙軒)이다.
대사헌[(大司憲) 휘 한소(諱 漢蕭)]의 제(弟)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평양서윤(平壤庶尹),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한준 (兪漢雋)】

 
저암공영정.jpg

생몰은 1732(영조8)~1811(순조11)이며, 자는 만청(曼淸) 또는 여성(汝成), 호는 저암(著庵) 또는 창애(蒼厓)이다. 처음 이름은 한경(漢炅)이었다.
당대의 문인·서예가로 이름 높던 유한지(兪漢芝)의 육촌형으로 문장뿐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학자이다. 1768년(영조 4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김포군수 등을 거쳐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남유용(南有容)의 제자로 송시열(宋時烈)을 추앙하여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 한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저암집》이 있다.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벗으로 둔 화가들은 많았던 듯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그가 쓴 제발문(題跋文)이 자주 눈에 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영조실록,순조실록,저암집,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유한인(兪漢人)】

1741(영조 17)∼1806(순조 6)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여옥(汝玉), 호는 도암(陶庵)이다. 아버지는 진사 언익(彦益)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88년(정조 12) 정언이 되었다. 1804년(순조 4) 외직인 단성현감으로 나가 민막(民#막05)을 제거하고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그는 인품이 청간(淸簡), 엄정(嚴正)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운 일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또한, 여가에는 경의(經義)를 강론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는 한편, 청담(淸淡)한 시취(詩趣)로 시영(詩詠)을 즐기기도 하였다. 1806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죽었으며, 왕이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1810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모현사(慕賢祠)를 사액 받아 그곳에 제향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도암실기(陶庵實紀)


【유한녕(兪漢寧)】

생몰은 1743 ~ 1795 이며, 자(字)는 자안(子安)이며, 영의정(領議政) 휘 척기(拓基)의 손(孫)으로 생원(生員)에서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관(官)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국조방목


【유한지(兪漢芝)】

 
유한지묘소.jpg



위치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생몰을 1760~1834이며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기원(綺園)이다.
영조 36년(1760년) 경진 8월1일 유시(酉時)에 생(生)하시어 산청현감, 영춘현감, 진천현감,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손꼽힌 유한준(兪漢寯)의 재종제로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전서와 예서에 능하였으며 필체가 아름다웠다. 서풍은 글자 모양이 매우 정돈되고 또한 규모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신위는 경수당집에서 청풍군수 윤제홍의 산수화와 영춘현감 유한지(漢芝)의 전서, 예서가 당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근역서휘 근묵 등에 전하는 공의 글씨를 보면 당시 빈번했던 중국과의 내왕에 따라 전래된 비첩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을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경포대 현판, 백운암현판(충주 엄정면 소재), 만안교비(경기도 안양시 소재, 만안교 정조 19년 경기지방문화재), 화홍문 편액(정조 18년 경기지방문화재), 은해사 영파대사비(경북 영천소재, 경북문화재), 문익점신도비의 전액(경북 산청, 경남문화재 자료 제53호), 이주국장군 신도비(경기도 용인시 소재, 용인향토유적 제4호), 해운정 전액(강원 삼척시), 병암진장첩[김홍도, 홍의도, 유한지(漢芝) 작 유물], 충목공(휘 홍, 좌의정) 신도비(경기 하남 소재)와 또한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의 글씨와 전각이 소장되어 있다. 공의 글씨와 전액은 현재에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갑오 8월1일 향년 75세로 하세하시었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뫼셔져 계십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유만주(兪晩柱)】

생몰은 (1755∼1788)이며, 공은 일기인 『흠영(欽英)』을 남겼는데 이 책은 1775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13년간 기록한 일기인데, 일기의 대부분이 독서와 사색의 편력으로 가득 차 있는 실로 방대한 독서일기를 남겼다. 이 책에서는 암송해야 할 책은 몇 번 읽었는지를 꼼꼼히 밝혔고, 거저(巨著)인 경우에는 날마다 얼마씩 읽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경화노론 지식인의 사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부친은 대문장가 유한준이며, 사위는 김도희(金道喜)이다. 김도희(金道喜)는 추사 김정희의 6촌 형으로 1843년(헌종 9) 좌의정, 뒤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흠영(欽英)


【유병주(兪秉柱)】

생몰은 1778(정조 2)∼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여(德汝). 금산군수 한기(漢紀)의 아들이다. 일찍이 김원행(金元行: 金昌協의 孫)에게 수학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었고, 1811년 숭릉참봉(崇陵參奉)에 배수되었으며, 그뒤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세자시강원설서·장악원주부·형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외직으로 나가 증산현령이 되었는데,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군향(軍餉)을 충족시켰다.
1817년 평양부서윤에 제수되자, 기자묘(箕子廟)를 수리하고 텅빈 부고(府庫)에 20만냥을 예축하였으며, 부정한 서리(胥吏)로부터 30만냥을 환수하는 치적을 쌓았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판관, 다시 서윤으로 승임되었고,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하자 총호사(摠護使)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던 능의 산역(山役)을 완공시켰다. 그 뒤 사직서령(社稷署令)·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휘경원도감랑(徽慶園都監郎)·광흥창수 등을 역임하고, 1826년 이천부사를 지낸 뒤 1832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매산문집(梅山文集)


【유화주(兪華柱)】

생몰은 1797 ∼1860이며 자(字)는 성집(聖執), 호(號)는 정일재(靜一齋) 또는 경호(鏡湖)이다. 기원(綺園)[휘 한지(諱 漢芝)]의 자(子)이며 특히 글체는 명필이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성환 (兪星煥)】

생몰은 1788 ~ 1849이며, 자(字)는 경여 (景汝), 호(號)는 석란 (石蘭) 또는 경재 (敬齋)이다. 직장(直長)평주(平柱)의 자(子)이며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官)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세환(兪世煥)】

생몰은 1796 ~ 1878이며 자(字)는 문해(文海)이다. 장령(掌令) 휘 한인(諱 漢人) 의 손(孫)이다. 문과급제하였으며 관(官)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장환(兪章煥)】

생몰은 1798(정조 22)∼1872(고종 9)이며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운여(雲汝), 호는 이재·난실(蘭室). 아버지는 직장 평주(平柱)이며, 어머니는 이길모(李吉模)의 딸이다. 집안이 가난하였다.
1826년(순조 2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설서·지평·교리를 거쳐 1829년에는 진하서장관(進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뒤 참의·참판·승지·대사간 등 요직을 지냈고, 안변·경주·양양·강계·회양·파주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또, 1858년(철종 9) 이후에는 강화유수·도총부도총관·의정부우참판을, 그리고 임술민란이 일어난 뒤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민심수습과 치안유지에 힘썼다.
고종 즉위 후에도 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 고위직에 등용되었으며, 1864년(고종 1)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867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순조실록,헌종실록,철종실록,고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