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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1573
1576~1674
1684~1798
1800~1992
대동보 약사
찾아오시는길
 
 
 
유신환(兪莘煥) 1801 ~ 1859
유성환(兪晟煥) 1804 ~ 1888
유교환(兪敎煥) 1805 ~ 1857
유초환(兪初煥) 1819 ~ 1893
유기환(兪箕煥) 1858 ~ 1913
유창환(兪昌煥) 1870 ~ 1935
유치숭(兪致崇) 1804 ∼ 1878
유치선(兪致善) 1813 ∼ 1874
유치봉(兪致鳳) 1826 ∼ 1906
유치형(兪致衡) 1877 ∼ 1933
유진오(兪鎭五) 1808 ~ 1873
유진필(兪鎭弼) 1860 ∼ 1925
유진태(兪鎭泰) 1872 ~ 1942
유진오(兪鎭午) 1906 ~ 1987
유길준(兪吉濬) 1856 ~ 1914
유성준(兪星濬) 1860 ∼ 1934
유일준(兪日濬) 1895 ~ 1932
유해준(兪海濬) 1917 ∼ 1986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
유민식(兪民植) 1898 ~ 1942
유상근(兪尙根) 1922 ∼ 1992


※ 배열 순서 : 항렬순이며, 동항렬(同行列)시 연배순 위의 명(命)자(字), 하(夏)자(字) 는 동항렬(同行列)임.


【유신환 (兪莘煥)】

생몰은 1801~1859이며,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형에게서 기초 학문을 지도 받아 경사(經史)·자집(子集) 등에 통달하고, 율력(律曆)·산수에 밝았다. 1844년(헌종 10)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전의(全義)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민폐를 근절하였으므로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감사(監司)의 모함을 받아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벼슬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며 후진을 교도하였다.
윤병정(尹秉鼎), 서응순(徐應淳), 김낙현(金洛鉉), 김윤식(金允植) 등 유명한 공경(公卿) ·문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 정치·경제·군사적 이해득실을 논하였다. 저서에 《봉서집(鳳棲集)》, 《패동수언(浿東粹言)》,《동유연원(東儒淵源)》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전고문헌(典攷文獻), 봉서집(鳳棲集),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玄相允, 民衆書館, 1949), 한국철학사(韓國哲學史, 유명종 劉明鍾, 日新社, 1980).

 



【유성환(兪晟煥)】

생몰미상, 호는 국포(菊圃)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고종 16년(1879) 2월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교환 (兪敎煥)】

생몰은 1805 ~ 1857이며 자(字)는 문국(文國), 호(號)는 혜산(兮山)이다. 참판(參判) 세환(世煥)의 제(弟)이며 문과급제 하였고 정언(正言)을 지냄. 특히 그림(畵)에 뛰어났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초환(兪初煥)】

생몰은 1819~1893이며 자(字)는 백선(伯善),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헌종 15년(1849년) 진사시 2등[숭정기원후사기유식사마방목 작자미상(규1084 규1420)], 철종 14년(1863년) 식년 문과급제[병과 10등 (조선조방목)]하였다. 기원 유한지(漢芝) 공의 손자로 예서와 전서에 능하셨다. 순조 기묘 유월초이일에 생하시어 현종 15년에 진사시에 2등 급제하시여 성균관에 들어가시어 찰방으로 기유 진사 계해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평안도 용강현령 형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한성부좌윤을 지내셨다. 계사 십월십육일에 하세하시였다. 우의정 박규수 공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용강 현령 유초환(初煥)은 정사에 있어 공정하고 백성을 살필 줄 아는 목민관이라 하여 높이 평가 하였고 이에 고종황제는 이것이야말로 신하의 응당한 본분이니 아주 좋게 여기는 바이다. 품계를 높여 한 임기를 그대로 임지에 있게 하라고 하였다. 유적으로 삼척시 해운정에 양송 전해진다. 저서에 『남강만록』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기환(兪箕煥)】

생몰은 1858~1913이며 1888년(고종 25) 감리부산구통상사무(監理釜山口通商事務)에 이어, 1889년 주차일본판리대신서리(駐箚日本辦理大臣署理)가 되었다. 1898년(광무 2) 군부대신서리(軍部大臣署理) 때 이준(李儁) 등 독립협회 간부들을 투옥, 개화세력을 탄압하였다. 1902년 전권대신으로 덴마크 전권대사 A.파블로프와 조정수호통상조약 및 부속통상장정을 조인하였다. 그뒤 주일한국대리공사로 재임시 김옥균(金玉均)을 상하이(上海)에서 암살한 정부의 자객 홍종우(洪鍾宇)를 중국정부와 교섭, 귀국시켰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음청사(陰晴史), 독립협회연구(獨立協會硏究, 신용하 (愼鏞廈, 일조각一潮閣, 1976)


【유창환(兪昌煥)】

생몰은 1870(고종 7)~1935 , 자(字)는 주백(周伯), 호는 우당(愚堂)이다.
한말의 서예가로 김정희(金正喜) 이후의 일인자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지만 음양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덕을 지닌 우국지사이다. 의병을 조직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고, 향리에 학교를 설립 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남궁훈(南宮薰) 선생과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를 창립하는 등 영재를 양성하여 국혼을 일으키는데 진력하기도 하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의 책을 익혀 문장에 통하였으며,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있었다. 글씨는 각 체를 두루 하였는데, 특히 초서(草書)가 돋보여 호건유창(豪健流暢)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입선하였다. 필적으로 경남 사천의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 서울의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규설묘표(韓圭卨墓表)] 등이 있다. 우리 문중의 문장이셨던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 선생의 부친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치숭(兪致崇)】

생몰은 1804∼1878이며, 자(字)는 시현(時顯)이며, 호는 기산(杞山)이다. 참찬(參贊) 휘 하익(夏益)의 후손이며 진사(進士)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치선(兪致善)】


 
(효간공영정(규장각). jpg)


생몰은 1813(순조 13)∼?. 자는 자경(子慶)이다. 인환(仁煥)의 자(子)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서울 출신으로 순조 31년(183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사로 판관의 직에 있으면서, 헌종 10년(184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사과, 대사성,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4년(1867)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계유씨세보(杞溪兪氏世譜)》를 중간하고, 1874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참의, 판서 등을 지내고, 고종 6년(1869)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헌종실록,철종실록,국조방목,청선고(淸選考)



【유치봉(兪致鳳)】

생몰은 1826(순조 26)∼1906이며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 자(字)는 순서(舜瑞), 호는 하산(霞山)이다. 벼슬은 통정의관(通政議官)을 지냈으며, 서화(書畵)에 뛰어났음. 향년(享年) 81세. 산수화를 즐겨 그리고,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겸하여 잘 썼다고 전해오는데, 유작에 〈십장생도 十長生圖〉(개인 소장)가 전한다. 《홍약루회인시록 紅藥樓懷人詩錄》에 김석준(金奭準)의 찬시(讚詩)가 실려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吳世昌),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 유복열,劉復烈)


【유치형(兪致衡)】

 
(치형공묘소(현민선생부모님). jpg)


위치 : 경기도 하남시 상곡동

생몰은 1877(고종 14)∼1933이며 한말의 법률가. 경기도 광주출신. 현민 선생[휘 진오(鎭午)]의 부친이시다.
길준(吉濬) 등 집안의 개화지식인들의 영향을 받고, 1895년 3월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보통과에서 공부하고 1896년 7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동경의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입학하여 3년간 법학을 공부하고 1899년 7월 12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본 사법성과 각 재판소에서 견습을 한 뒤 1899년 11월 귀국하여 이듬해 8월부터 공립 철도학교(鐵道學校) 교사가 되어 1901년 12월까지 근무하였다. 1901년 9월 법부의 법률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2월 주영공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임명을 받았고, 이한응(李漢應)의 후임으로 영국으로 부임하기로 되었는데,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천항의 러시아선박이 격침되어 출국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사정이 바뀌자 6월 21일에는 궁내부 회계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제실제도(帝室制度) 정리국비서로 임명되어 1906년 1월까지 근무하였다.
1906년 2월에는 궁내부 제도국 참서관이 되었고, 12월에는 제실재정회의 기사장(記事長)이 되었다. 1907년 6월에는 수학원(修學院) 교관이 되었고, 대동전문학교(大東專門學校)·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민법·해상법 등을 가르쳤다.
1907년 6월에는 궁내부참서관과 궁내부 대궁(大宮) 관방내사과장을 겸임하였다.
1908년 8월에는 궁내부서기관이 되었고, 그달 31일부터는 어원사무국(御院事務局) 이사로 임명되어 3년간 봉직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이왕직(李王職)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는 관직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닫고, 1913년 4월 주식회사 한성은행(漢城銀行) 서무과장으로 취직하여 계속 근무하였다.
저서로는 《헌법》(1907)·《해상법》(1907)·《물권법 1·2부》(1908)·《경제학》(1908) 등의 단행본 교과서들이 있으며, 친필사본으로 《국제법약설 國際法略說》·《일본헌법》·《일기》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유치형일기(兪致衡日記), 개화기 한국법제사료(최종고), 한국의 법률가상 유치형(최종고)



【유진오(兪鎭五)】

생몰은 1808 ~ 1873이며, 자(字)는 경중(景仲) , 호(號)는 사천재(史泉齋)이다.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 휘 한소(諱 漢蕭)의 사손(嗣孫)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官)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선영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국조방목


【유진필(兪鎭弼)】

생몰은 1860(철종 11)∼1925.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우경(右卿), 호는 기헌(杞軒).이다. 예조판서 장환(章煥)의 손자이고, 공조참판 치희(致喜)의 아들로 치량(致良)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이공민(李功敏)의 딸이다.
1879년(고종 16) 진사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얻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 수찬·규장각직각을 거쳤고, 다음해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신기선(申箕善)·지석영(池錫永)을 갑신정변관련자로서 추국(推鞠)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또한 4년 뒤에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지석영의 사면에 반대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비정권하에서 교리·검교·대사성·승지 등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갑오경장이 시행되면서 다시 등용되지 못하였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고종실록,국조방목


【유진태(兪鎭泰)】

생몰은 1872~1942이며,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이 창설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민족 자강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김창숙(金昌淑) 등이 프랑스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진정서를 전국 유림(儒林)들을 중심으로 작성 서명하자 평안도 지역을 맡아 서명활동을 하였으며, 이어 김창숙이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갈 때 동행인으로 박돈서(朴敦緖)를 소개해 주었다.

1920년 6월 민족교육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의 설립을 주도하고 교육제도 개선, 지방 순회강연, 도서관 설치 등 교육 계몽활동을 계획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이승만·김규식(金奎植) 등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조선교육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조선교육회의 명칭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로 변경하고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전국 순회강연 및 한글강습회 개최 등을 통한 청년계몽과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23년 1월 서울에서 이종린(李鐘麟)·백관수(白寬洙) 등 20여 개 단체의 대표들이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할 때 그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조선교육회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여 같은 해 4월 2일 개최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유성준(兪星濬)·강인택(姜仁澤) 등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경성 지회장이 되었고, 1930년 11월에 열린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중앙검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5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활발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



【유진오 (兪鎭午)】

 
유진오사진.jpg

생몰은 1906~1987이며 호는 현민(玄民). 서울 출생.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예과 강사를 거쳐 보성(普成)전문학교 법학교수가 되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조선지광(朝鮮之光)》 《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전성기 동반작가(同伴作家)로 《갑수의 연애》 《빌딩과 여명(黎明)》 등의 작품을 썼고, 1938년 장편 《화상보(華想譜)》를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면서 1951년 한일회담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1952년 학계로 돌아가 고려대학 대학원장을 거쳐 총장에 취임하였는데, 1953년 국제법학회 회장에 피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유엔 한국협회장이 되었으며, 1964년 대한교육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 법전편찬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정계로 들어가 신민당(新民黨) 총재가 되어 그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 1970년 신민당 고문에 취임하였다. 1974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에 취임하고, 1980년 통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학술원 공로상 및 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에 《헌법해의(憲法解義)》 《헌법강의(憲法講義)》 《민주정치의 길》 《젊은 세대에 부치는 서(書)》 등이 있고, 문학작품에 《유진오(兪鎭午) 단편집》 《김강사(金講師)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 수상집에는 《구름 위의 만상(漫想)》 《젊은 날의 자화상(自畵像)》 《양호기(養虎記)》 등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위대한 사상가들(최종고), 한국의 법학자(최종고), 한국법사상사(최종고), 현민유진오의 법사상(전광석)



【유길준(兪吉濬)】

(유길준사진1. jpg)
(서유견문전시.jpg)

생몰은 1856~1914이며,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생이며 휘 진수(鎭壽)의 자(子)이다. 1881년(고종 18)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1882년 귀국, 1883년 외무랑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도미(渡美), 보스턴대학을 다녔다.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95년에 탈고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지내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 18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 후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훈1등 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했다. 저서에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영법로토 제국 가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구당시초(矩堂詩)》 《구당선생집(矩堂先生集)》 《세계대세편(世界大勢編)》 《정치학(政治學)》 《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 《이태리 독립전사(伊太利獨立戰史)》 《파란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 《구당서간집(矩堂書簡集)》이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서유견문(西遊見聞),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독음청사(續陰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민중의 친우 유길준선생(개벽사편집국), 유길준의 자본주의정신(홍이섭), 유학시절의 유길준을 찾아서(이광린), 유길준 개화사상(김영호), 유길준의 개화사상(서유견문을 중심으로―이광린),군국기무처 의안의 분석(류영익),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류영익)



【유성준(兪星濬)】

생몰은 1860(철종 11)∼1934이며, 한말의 법률가·관리, 일제강점기의 정치가이며 서울출신이다. 휘 진수(鎭壽)의 자(子)이며 개화의 선각자 길준(吉濬)의 친동생이다.
1883년(고종 20)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수학도중에 수신사 일행의 권유를 받고 1885년 1월에 귀국하였다.
5월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가 되었다가 다음 달에 내무부부주사로 옮겼다.
1887년 6월에는 국서이정위원(國書釐整委員)의 명을 받고 일본에 주재하다가 8월에 귀국하여 내무부주사가 되었다.
1891년에는 전운서(轉運署) 사무관이 되어 1893년 5월 조운수선(遭運輸船) 창룡호(蒼龍號)의 수리를 위하여 나가사키항(長崎港)에 있다가 8월에 돌아왔다.
1895년에는 농상공부 회계국장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그해 5월 정부의 명을 받아 일본 요코하마항(橫濱港)에 관세율을 배우기 위한 5인의 견습수세사무(見習收稅事務)에 발탁되어 다시 일본으로 갔다.
11월에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4월에 국사범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3월에 동경부기전문학교(東京簿記專門學校)에 입학하여 8월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의 순사교습소에서 순사교습사무를 견습하였다.
1898년 1월에는 동경의 메이지법률학교(明治法律學校)에 입학하여 1년간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명을 받고 1899년 9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국사범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경위원(警衛院)에 체포되어 수개월 수감되어 있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1903년 3월에 황주읍 교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하고 서울에 돌아와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해 12월에 통진군수로 임관되었다. 다음해 1월에는 내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고, 지방조사위원이 되었다.
8월부터는 내부 지방국장과 치도국장(治道局長)을 겸하였고, 12월에는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지방관전고위원(地方官銓考委員)과 문관전고소위원(文官銓考所委員)을 겸임하였다.
1907년에는 내부협판에 승진하였고, 관제조사위원(官制調査委員)을 겸하였다.
8월에는 법부 법제국장이 되고, 문관전고소위원장이 되었다. 이해 12월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장 신해영(申海永)의 후임으로 제2대교장이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법전조사국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10년에 충청북도 참여관(參與官), 1926년에 충청남도지사, 1927년에 강원도지사를 역임하였고, 조선물산장려회 1·2대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최초의 《법학통론》(1905)과 국한문 《신약전서》(1916)가 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고려대학교칠십년지(고려대학교), 연동교회사(1975), 개화기의 한국법문화(최종고)


【유일준(兪日濬)】

 
(유일준박사. jpg)

생몰은 1895~1932이며, 경기도 안성 출생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병균에 대해 연구하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장티푸스 등 여러 병균에 대한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미생물학 교수를 지내면서 후배양성과 세균연구에 힘썼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과학과 기술(한국과학기술단체연합회,1984)



【유해준(兪海濬)】

생몰은 1917∼1986이며 독립운동가로. 충남 당진출생이다.
합덕보통학교와 예산농업학교를 수료한 뒤 1935년 중국 봉천(奉天)과 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였다.
1936년 김원봉(金元鳳) 일파 주도하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입당하였다가 항저우(杭州)로 가서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였다.
1937년 광둥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 입학하였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재건을 위하여 다시 난징에 와서 한국독립당에 복귀, 항저우잔류인원의 후송 책임을 수행하였다.
1937년 중국 황푸 군관학교(軍官學校) 제15기 제1총대 포병대대 제2대에 배속되어 중국학생과 함께 창사(長沙)·한커우(漢口)·충칭(重慶)·비산(畢山)·청두(成都)로 이동한 뒤 훈련을 받고 청두에서 졸업하였다.
그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의 복귀명령에 따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
1940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전속 부관직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중국전방장사위로부녀회(中國前方將士慰勞婦女會) 회장 쑹메이링(宋美齡)을 방문하여 한국광복군 창설 축하찬조금 10만원을 받아 광복군총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40년 후반 시안(西安)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 10여명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나월환(羅月煥)외 50여명과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 개편되자 광복군 전방사령부 소속으로서 파견근무하게 되었고, 중국군 중위계급으로 제3구대장직을 맡아 간사단한청반(幹四團韓靑班)제1기생을 훈련시켜 졸업시키고 원대복귀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간부로 배속되어 지대장 고운기(高雲起)·지달수(池達洙) 등 간부들과 함께 신편요원(新編要員)이 되어 쑤이위안성(綏遠省) 산바(陝複: 傅作儀의 중국 제8전구사령부 소재지)로 가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최전방 중국 각 부대를 순방하고, 적후공작 거점이 될 마잔산(馬占山)부대가 있던 신민바오(新民堡) 근처의 현(縣)정부 소재지로 이동하였다. 그는 현정부 내에 배속되어 일본의 점령지구인 쑤이위안성 바오터우(包頭)에 잠입하기로 하고 중국 위군(僞軍)에 가입대(假入隊)하였다.
10여일 뒤 위군복장으로 일군 초병의 검문을 뚫고 통과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포섭하였던 최준(崔俊)이라는 자가 일본 헌병대에 자수함으로써, 이를 모르고 있던 그는 징모분처의 간부들과 일본헌병들에 붙잡혀 일본 구주(九州)로 이송되었으며, 오구라(小倉)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7), 한국독립사 하(금승학, 독립문화사, 1965),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국사편찬위원회, 1972),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974), 한국광복군(이현희, 독립기념관, 1990)


【유억겸 (兪億兼)】

(유억겸초상화. jpg)
(유억겸기념관(연세대).jpg)


생몰은 1895~1947이며, 1909년 계산(桂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20년 귀국 후 중앙고보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연희전문의 법학교수가 되었다. 1934년 흥업(興業)구락부 사건으로 3개월 간 경찰에 구금되었으며, 석방된 뒤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임하고 1937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 부교장을 거쳐 1945년 광복과 함께 교장이 되었으며,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 1946년 미군정의 문교부장, 1920~1947년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교육부문의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연세대학교사(연세대학교, 1969), 진리와 자유의 기수들(연세대학교, 1982).



【유민식(兪民植)】

생몰은 1898~1942이며 이명(異名)은 정근(政根)으로, 1898년(고종 35)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났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합병하자,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滿洲)로 건너가 만주와 해삼위(海蔘威) 등지를 오가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상하이[上海]로 가서 같은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뒤, 신규식(申圭植)·홍진(洪震) 등과 함께 의정원 충청도 대표로 활약하였고, 계속해서 재정심사위원·예결위원·민단부장(民團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3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을 보좌한 뒤, 이듬해 5월에는 김좌진의 밀명을 받고 신찬우(申贊雨)와 함께 국내로 특파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 출옥한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김혁(金赫)·나중소(羅仲昭) 등이 조직한 재만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회 경리부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27년 2월 김혁 등과 함께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1934년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42년 1월 병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과 옥고의 여독으로 1개월 만에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동아일보,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부출판사, 1983).



【유상근(兪尙根)】

 
(유상근초상화. jpg)

생몰은 1922∼1992이며 교육자이다. 호는 방목이며 충남 부여출신이다. 아버지 원준(元濬)과 어머니 윤원자(尹原子)의 6남매 중 장남(長男)이다.
1953년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관계에 들어가 충청북도 산업국장과 내무부 통계국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1969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통일원차관을 거쳐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관료로서보다는 교육사업가로 더 알려져 있다.
즉, 1956년 명지학원(明知學園)을 설립하여 산하에 명지대학교·관동대학교·명지중고등학교 등 9개의 교육기관을 두는 학원으로 발전시켰으며, 1961년 명지대학장, 1988년 명지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으로서 봉사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려 하였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서 반공교육에도 앞장섰다.
저서로 《행정학개론》·《현대교육과 교양교육》·《한국고대관제사연구》 등이 있다.
1967년 독일연방공화국문화공로훈장,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9년 파키스탄정부의 최고훈장인 '국부의 별'을 받았다.
【출처】기계유씨대동보(신미보),명지학원40년사(명지학원, 1989).